[김영선의 'ASEAN 톺아보기' (12)] 쌀의 힘, 아세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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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의 엠블럼은 열 개 회원국을 상징하는 벼줄기 열 개를 허리춤에서 한 단으로 묶어 놓은 형상이다. 여러 나라로 구성된 지역 협력기구의 엠블럼에 먹거리가 등장하는 드문 예다. 더운 나라 먹거리를 대표하는 많은 열대작물이 있음에도, 벼를 상징으로 채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양성의 문화가 특징인 아세안 국가 모두의 주식이 쌀이고 쌀은 자고로 부(富), 번영, 복지를 의미하는 자양물, 즉 그들의 소울푸드인 까닭이다. 아세안 창설자들은 각각의 나라가 하나로 묶인 볏단같이 우애롭고 결속된 협력체로서 화합하고 발전해 나가기를 꿈꿨다.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쌀은 대부분 길고 가는 인디카(장립종)로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단립종)와는 맛도 식감도 다르다. 이것은 안남미라고도 불리는데 밥을 지어 놓으면 풀기 없이 날린다고 해서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쌀 문화야말로 다양하고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밥, 떡, 죽은 물론 우리에겐 없는 쌀국수 문화가 발달했다. 포, 퍼, 페 등 지역에 따라 살짝 다른 발음으로 불리는 쌀국수는 이제 우리가 즐겨 먹는 동남아 대표음식이 됐는데, 현지에 가면 훨씬 다양한 종류를 맛볼 수 있다.
쌀은 생명줄이며 소울푸드
안남미에도 찹쌀이 있어 우리처럼 떡도 만들고 경단도 만든다. 그중 안남미 검은 찹쌀에 코코넛 밀크와 코코넛 슈거를 곁들여 달큰하게 만든 디저트는 누구나 좋아하는 요리다. 케이크, 푸딩 같은 쌀가루를 이용해 만드는 디저트도 무수히 많다. 밥을 지을 때 물 대신 육수, 코코넛 밀크를 사용하거나 향신료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내고 흰 쌀밥에 갖은 고명과 채소를 넣어 비벼 먹기도 한다. 나시고렝이란 볶음밥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닭 육수에 끓이는 죽은 우리의 닭죽과 유사한데 땅콩, 멸치, 달걀, 파 등의 토핑을 올려 간을 맞추고 다양한 맛을 연출한다.
얼마 전 아세안은 우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주는 상을 제정했는데 그 이름이 ‘밥그릇 상(Rice Bowl Awards)’이라 한다. 아세안의 새로운 경제성장을 담는 그릇으로서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쌀 문화 국가들의 뜻이 단박에 와 닿는다.
아세안 국가들은 그들의 생명줄이며 소울푸드인 쌀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이모작, 삼모작도 가능한 기후 조건이니 자급자족은 물론 모두 쌀 수출 국가가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태국과 베트남은 세계 2, 3위 쌀 수출국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 쌀 생산국이면서도 쌀을 수입하고 있고, 말레이시아도 2022년 쌀 자급률 80%를 목표로 분투 중이다. 2008년 국가적 위기 수준의 쌀 파동을 겪은 필리핀은 아직도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쌀 부족은 관개 인프라 미비 등 농업 투자 부족, 인구 증가,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주요 원인이다.
사실 필리핀은 1980년대 초까지 주요 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다. 1960년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록펠러재단, 포드재단, 필리핀 정부의 지원으로 설립됐다. 쌀과 관련된 연구와 교육을 통해 아시아 지역의 기근을 방지하고 식량자급을 확립하는 ‘녹색혁명’의 메카였다. 한국도 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1970년 초반 국제미작연구소와의 협력을 통해 기적의 쌀 통일벼 품종을 개발했고, 1977년 드디어 쌀 완전 자급을 달성할 수 있었다. 쌀 막걸리 생산 허용이 그해 10대 뉴스에 선정될 정도였으니 쌀 자급 실현은 우리에게도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식량안보는 기근 및 빈곤 퇴치 등 생존의 문제를 넘어 삶의 질을 향상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는 핵심 개념이다. 쌀은 생산과 소비의 90%가 아시아에서 이뤄진다.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은 비상 상황 발생 시 쌀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아세안+3(한·중·일) 비상쌀 비축제(APTERR)’를 2012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마음을 이어줄 '쌀 협력'
한국도 15만t의 비축물량을 약정했으며 자연재해 시 긴급구호 차원에서 무상 지원을 행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미얀마에 500t, 캄보디아에 250t의 쌀을 긴급 지원했다. 올초에는 베트남 태풍 피해 이재민에게 1만t의 쌀을 지원했고, 최근에는 폭우 피해를 입은 라오스와 미얀마에 각각 1000t, 1300t의 쌀을 추가 지원했다. 또 자연재해와 초국경 동식물 질병 등 식량안보 위협에 관한 정보시스템을 운영하고 전문가를 양성하는 사업에도 적극 협력하고 있다.
쌀 자급률은 100%지만 전체 식량 자급률이 50% 수준인 우리로서도 식량안보는 중요한 문제다. 같은 쌀 문화를 공유하는 아세안과의 쌀 협력은 식량안보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배려와 포용의 의미가 있다. 이런 협력정신은 아세안과 한·중·일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문화에도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쌀은 대부분 길고 가는 인디카(장립종)로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단립종)와는 맛도 식감도 다르다. 이것은 안남미라고도 불리는데 밥을 지어 놓으면 풀기 없이 날린다고 해서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쌀 문화야말로 다양하고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밥, 떡, 죽은 물론 우리에겐 없는 쌀국수 문화가 발달했다. 포, 퍼, 페 등 지역에 따라 살짝 다른 발음으로 불리는 쌀국수는 이제 우리가 즐겨 먹는 동남아 대표음식이 됐는데, 현지에 가면 훨씬 다양한 종류를 맛볼 수 있다.
쌀은 생명줄이며 소울푸드
안남미에도 찹쌀이 있어 우리처럼 떡도 만들고 경단도 만든다. 그중 안남미 검은 찹쌀에 코코넛 밀크와 코코넛 슈거를 곁들여 달큰하게 만든 디저트는 누구나 좋아하는 요리다. 케이크, 푸딩 같은 쌀가루를 이용해 만드는 디저트도 무수히 많다. 밥을 지을 때 물 대신 육수, 코코넛 밀크를 사용하거나 향신료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내고 흰 쌀밥에 갖은 고명과 채소를 넣어 비벼 먹기도 한다. 나시고렝이란 볶음밥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닭 육수에 끓이는 죽은 우리의 닭죽과 유사한데 땅콩, 멸치, 달걀, 파 등의 토핑을 올려 간을 맞추고 다양한 맛을 연출한다.
얼마 전 아세안은 우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주는 상을 제정했는데 그 이름이 ‘밥그릇 상(Rice Bowl Awards)’이라 한다. 아세안의 새로운 경제성장을 담는 그릇으로서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쌀 문화 국가들의 뜻이 단박에 와 닿는다.
아세안 국가들은 그들의 생명줄이며 소울푸드인 쌀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이모작, 삼모작도 가능한 기후 조건이니 자급자족은 물론 모두 쌀 수출 국가가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태국과 베트남은 세계 2, 3위 쌀 수출국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 쌀 생산국이면서도 쌀을 수입하고 있고, 말레이시아도 2022년 쌀 자급률 80%를 목표로 분투 중이다. 2008년 국가적 위기 수준의 쌀 파동을 겪은 필리핀은 아직도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쌀 부족은 관개 인프라 미비 등 농업 투자 부족, 인구 증가,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주요 원인이다.
사실 필리핀은 1980년대 초까지 주요 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다. 1960년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록펠러재단, 포드재단, 필리핀 정부의 지원으로 설립됐다. 쌀과 관련된 연구와 교육을 통해 아시아 지역의 기근을 방지하고 식량자급을 확립하는 ‘녹색혁명’의 메카였다. 한국도 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1970년 초반 국제미작연구소와의 협력을 통해 기적의 쌀 통일벼 품종을 개발했고, 1977년 드디어 쌀 완전 자급을 달성할 수 있었다. 쌀 막걸리 생산 허용이 그해 10대 뉴스에 선정될 정도였으니 쌀 자급 실현은 우리에게도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식량안보는 기근 및 빈곤 퇴치 등 생존의 문제를 넘어 삶의 질을 향상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는 핵심 개념이다. 쌀은 생산과 소비의 90%가 아시아에서 이뤄진다.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은 비상 상황 발생 시 쌀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아세안+3(한·중·일) 비상쌀 비축제(APTERR)’를 2012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마음을 이어줄 '쌀 협력'
한국도 15만t의 비축물량을 약정했으며 자연재해 시 긴급구호 차원에서 무상 지원을 행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미얀마에 500t, 캄보디아에 250t의 쌀을 긴급 지원했다. 올초에는 베트남 태풍 피해 이재민에게 1만t의 쌀을 지원했고, 최근에는 폭우 피해를 입은 라오스와 미얀마에 각각 1000t, 1300t의 쌀을 추가 지원했다. 또 자연재해와 초국경 동식물 질병 등 식량안보 위협에 관한 정보시스템을 운영하고 전문가를 양성하는 사업에도 적극 협력하고 있다.
쌀 자급률은 100%지만 전체 식량 자급률이 50% 수준인 우리로서도 식량안보는 중요한 문제다. 같은 쌀 문화를 공유하는 아세안과의 쌀 협력은 식량안보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배려와 포용의 의미가 있다. 이런 협력정신은 아세안과 한·중·일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문화에도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