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법원의 MOU
판사는 여러 면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이 어렵다. 업무와 상관없이 다양한 분야를 배우면서 훌륭한 분들과 교제할 기회가 많은 시절이지만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에서만큼은 많이 불리하다. 몇 번 처음 보는 사람들과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는 자리에 갔을 때마다 이를 절감했다. 그런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통상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일과 관련해 어려운 사정이 생긴 분들에게 언제든지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호탕하게 한다. 하지만 판사는 그런 약속을 결코 할 수 없다. 나는 내 업무 분야와 관련해 도움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아쉽다는 취지의 인사로 웃음을 유발해 자리를 모면해 왔다.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기관인 법원도 그 성격상 다른 기관이나 단체 등과 업무협약(MOU)을 맺는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변호사단체와의 MOU는 더 생소할 것이다.

서울회생법원이 출범한 지 이제 2년이 다 돼 간다. 서울회생법원은 국내 최초의 도산전문법원이다. 경영이나 재정 면에서 곤경에 빠진 기업이나 개인의 파산 또는 회생에 관한 절차를 전담한다. 따라서 명칭에 ‘파산’이나 ‘도산’을 포함시킨다면 법원 업무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호칭이 조금은 더 어려운 듯한 ‘회생법원’이란 명칭을 붙인 데는 ‘도산’보다는 ‘도산 상태로부터의 회복’에 중점을 둬서 채무자가 어려움을 잘 극복한 뒤 건실한 경제 주체의 일원으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서울회생법원은 개원할 때 어려움에 빠진 개인이나 기업이 실질적으로 재기하는 것을 지원하는 사명을 주요 설립 이념의 하나로 설정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합리적인 절차 운영과 제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고용노동부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서울지방변호사회, 미국 뉴욕남부연방파산법원, 싱가포르 대법원 등과 MOU를 체결했다.

이렇게 법원으로서는 생소한 MOU를 다방면으로 체결한 것은 다른 재판 절차에 비해 후견적, 회복적 성격이 중요한 도산 절차를 전담하는 법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서울지방변호사회와의 MOU는 파산 및 회생 절차에 의한 구제가 필요한 개인채무자가 적정한 비용으로 충실한 법률적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적극적인 공감에 힘입어 최근 소속 변호사 50여 명이 참여한 개인파산·회생지원변호사단이 출범함으로써 알찬 결실을 맺었다. 이런 MOU의 취지가 십분 실천된다면 도산 절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될 뿐만 아니라 힘든 처지를 악용하는 불미스러운 일도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