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돌아온 탕자’(1668년, 유화, 262×205㎝).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복음서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 중 방탕하게 인생을 산 두 번째 아들이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품안에 안기는 장면.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돌아온 탕자’(1668년, 유화, 262×205㎝).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복음서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 중 방탕하게 인생을 산 두 번째 아들이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품안에 안기는 장면.
실수하는 사람은 모른다. 자신이 그 일을 잘못했는지. 그는 자신의 습관대로, 혹은 자신이 이해한 사회의 관습대로 일을 저질렀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다면 깨닫는다. 그가 양식이 있다면, 후에 그 일을 돌이켜보거나 혹은 그 실수가 더 큰 실수로 이어질 때, 실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실수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는 안목이 있다면, 그는 행복하다. 매일매일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한 걸음씩 전진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겐 더 큰 실수가 엄습한다. 그 실수는 돌이킬 수 없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하마르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문학 및 예술작품의 내용과 기준을 정의한 《시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성격을 하나의 그리스 단어로 표현했다. 바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비극의 주인공은 하마르티아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친지를 해친다. 이 감정은 비극을 관람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성격이며,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든지 그의 생각과 말, 행동을 지배해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

하마르티아는 치명적인 실수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파국을 일으킬 만한 행위를 저지른다. 관객들은 그의 행위가 끔찍한 결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연민과 공포를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가 마음속에 층층이 쌓여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추방하고 말끔히 씻어내는 ‘카타르시스’로 이어진다고 했다.

하마르티아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지닌 성격이며 마음가짐이다. 하마르티아는 비(非)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반(反)사회적이거나 반가족적도 아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 ‘하마르타노’의 명사형으로, 그 원래 의미는 ‘(궁수가 활시위를 당겨 날아가는 화살이) 과녁으로부터 빗나가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궁수가 화살을 쐈으나 과녁에 다다르지 못하거나 빗나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평상시에 충분히 연습하지 못했거나, 연습을 했더라도 시위를 당기는 순간 정신줄을 놓아 산만한 경우다. 내가 궁술을 오늘 시작해 한두 달 후에 50m 떨어진 과녁을 맞힐 수는 없다. 내 팔의 근육이 아직 화살을 그 정도 거리까지 날릴 만큼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 동사에 ‘하타’라는 동사가 있다. 거의 모든 히브리어 단어는 일상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의미와 그 예가 상징하는 은유적인 의미가 있다. 하타는 그리스어 하마르티아와 비슷하게 ‘(화살이) 과녁으로부터 빗나가다’다. 은유적인 의미는 ‘죄를 짓다’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길이 바로 ‘토라(Torah)’다.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바로 이 길로부터 벗어나는 행위가 ‘죄’다. 4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을 체계화한 어거스틴은 인간을 ‘본성적으로 그 길에서 벗어나려는 육체적 욕망의 노예’라고 정의하고, 이 죄를 ‘원죄’라고 불렀다.

오만과 아둔

《안티고네》에서 크레온은 치명적인 결함인 하마르티아의 소유자다. 그는 테베를 공격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방치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것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또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는 자는 도시 밖에서 돌로 사형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크레온은 조카 안티고네가 시신을 매장하자 깊은 석굴에 감금해 아사시키려 한다. 아들 하이몬이 “안티고네를 동굴 안에서 죽도록 방치하는 것은 테베 시민들이 생각하기에 옳지 않다”고 말하지만 크레온은 오히려 그를 꾸짖고는 안티고네를 당장 살해하겠다고 위협한다. 하이몬은 안티고네가 있는 석굴로 찾아간다. 연인 안티고네가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자살한다.

크레온이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안티고네의 마음과 테베 시민의 마음, 그리고 하이몬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마르티아의 원인은 ‘무지(無知)’다. 하마르티아의 첫 번째 자식은 ‘오만(傲慢)’이다. 오만은 고대 그리스어로 ‘휘브리스(hybris)’라고 부른다. 휘브리스는 자신이 현재 누리는 혜택을 혼자 힘으로 이뤘다고 여기는 착각이다. 오만한 자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크레온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자비가 없었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려는 겸손이 없었다.

하마르티아의 두 번째 자식은 ‘아둔’이다. 아둔은 그리스어로 ‘아테(ate)’라고 부른다. 아테를 지닌 자는 자신이 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눈과 귀를 막는다. 눈에는 시커먼 안경을 끼고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고, 귀에는 누구의 조언도 들을 수 없도록 진공 귀마개를 장착한다. 하마르티아의 세 번째 자식이자 결말은 ‘복수(復讐)’다. 복수를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는 ‘네메시스(nemesis)’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크레온은 오만하고 아둔하다. 그는 그 대가로 스스로에게 복수한다. 네메시스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다시 주다’란 의미인 동사 ‘네메인’의 명사형이다. 크레온은 자기 자신에게 복수한 셈이다.

‘아, 치명적인 실수여!’

에우리디케는 아들 하이몬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령으로부터 듣는다. 그리고 그녀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퇴장한다. 아들이 죽는 과정을 상세히 들은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침묵은 구슬픈 통곡보다 무겁다. 전령은 왕비가 사람들 앞에서 통곡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침묵이 예사롭지 않다고 걱정하면서 말한다. “마님께서는 어리석은 짓을 할 만큼 분별없는 분은 아닙니다!”(1249~1250행) 그러자 합창대 대장이 대답한다. “나는 모르겠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무 조용한 것도 무익하고 시끄러운 비탄 못지않게 위험한 것 같습니다.”(1251~1252행)

크레온과 하인들은 석굴에서 자살한 아들 하이몬의 시신을 들고 무대로 등장한다. 크레온은 슬퍼한다. “아아, 분별없는 생각의 가혹하고도 치명적인 실수여!”(1261~1263행) 크레온은 이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이 아들의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인 정의를 아들의 죽음을 통해 고통스럽게 배우기 시작한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무대로 전령이 등장해 말한다. “여기 이 시신(하이몬)의 친어머니이신 불운하신 왕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은 아드님의 죽음에 충격을 받으셨습니다.”(1282~1283행)

크레온의 가족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들은 모두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하세계인 ‘하데스’의 경계로 이미 진입했다. 하인들은 에우리디케의 시신을 들것으로 운반해 하이몬의 시신 옆에 내려놓는다. 크레온은 아내의 시신을 보고 오열한다. “아아, 저기 두 번째 재앙이 보이는구나. 기구한 내 팔자! 다음에는 어떤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의 시신을 보고 마침내 깨닫는다. 이 모든 불행이 자신 때문이라고 외친다.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이 죄는 내 곁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도 전가되지 않을 것이다. 다름 아닌 내가 당신을 죽였으니까. 아아, 괴롭구나! 내가 저지른 짓이야!”(1317~1320행) 인간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크레온은 본의 아니게 아들과 아내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잘못돼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이 그를 덮쳤다.

헤아림

오만한 자에 내리는 가혹한 대가…아테네 시민은 '헤아림'을 배웠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의 핵심을 합창대의 마지막 노래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헤아림이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입니다.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오만한 자들의 큰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돼, 늘그막에 헤아림이 무엇인지 알게 해줍니다.”(1348~1353행) 합창대의 마지막 노래에 ‘헤아림’으로 번역된 그리스 단어 ‘프로네인(pronein)’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 프로네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pro), 그 사람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는 마음(nein)’이다. 비극 《안티고네》 공연을 숨죽여 보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 마음속에는 헤아림의 씨가 자라나고 있었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