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놔서"…4차 산업혁명 '승자의 저주' 걸린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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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풀, 핀테크, 블록체인…기존 산업 등쌀에 제자리걸음
카풀(승차공유) 서비스부터 핀테크(금융기술), 블록체인까지 4차 산업혁명 핵심분야들이 기존 산업시스템의 저항에 부딪쳐 지체되고 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지만 깊게 박힌 돌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 4차 산업으로의 이행기에 들어선 한국이 '승자의 저주'에 걸린 셈이다.
지난 20일 택시업계가 카풀 도입에 반대하며 여의도에서 집회를 연 게 대표적이다.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 전국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등 전국 택시 단체가 참여했고 전국적인 택시 파업 사태가 빚어졌다.
택시업계의 카풀 반대는 지난 2013년 우버가 국내 서비스를 선보이며 시작됐다. 이후로도 풀러스, 럭시 등의 카풀앱이 등장했지만 이슈가 되진 못했다. 어디서나 택시를 쉽게 탈 수 있기에 사용자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던 탓이다.
사실 한국의 택시는 꽤 사용하기 편리했다. 어느 택시를 타도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고 현금은 물론 신용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과거에는 목적지를 빙 둘러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비게이션이 보급된 이후로는 그런 우려도 많이 줄었다. 승차거부 역시 밤 시간대로 제한된 문제다.
때문에 국내 카풀 서비스가 등장한 것은 2013년이었지만, 지난해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에서 카풀을 주요 의제로 삼은 후에야 택시업계와의 갈등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국과 비슷하게 우버를 접한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2012년 동남아시아판 우버를 만들겠다며 운전자 40명으로 시작한 그랩은 6년 만에 동남아 차량호출 서비스 시장 75%를 점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랩의 경우 택시 기사도 호출할 수 있도록 하며 현지 택시업계를 흡수했다. 호출하기 힘들고 바가지요금과 낙후한 서비스 등으로 악평을 샀던 현지 택시업계는 그랩을 통해 사용성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기존 서비스가 제 역할을 못했기에 혁신을 빠르게 추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기존 서비스가 잘 구축된 탓에 혁신이 멈춘 상황은 핀테크에서도 발견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신용카드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지급수단 79.1%를 차지했고 직불·체크카드도 56.7%에 달했다. 도심 곳곳에서 은행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금융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그 결과로 올해 2분기 국내 간편결제 시장은 하루 평균 1174억원 규모에 그쳤다. 신용카드가 보편화된 탓에 간편결제의 필요성을 늦게 인지했고, 같은 이유로 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도 방치한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시중에 유통되는 위조지폐가 많고 금융 인프라도 낙후된 상황이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중국의 1인당 보유 신용카드는 0.33장으로 3명 중 1명만 신용카드를 보유했다. 인구 10만 명당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수와 은행 지점 수 역시 37.51개, 7.7개에 그쳤다. 결국 중국의 신용카드 시장은 성장하지 못했다. 대신 지난해 거래액이 15조4000억 달러(약 1경7400조원)에 달할 정도로 간편결제 시장이 확대됐다. 중국 저장대학교 인터넷 금융 아카데미 시나이랩이 매긴 글로벌 핀테크 도시 순위에서 서울은 16위에 그쳤는데, 베이징·상하이·항저우·심천은 각각 1·3·6·7위를 차지했다. 중국이 신용카드를 건너뛰며 핀테크 진화를 하자 서울보다 앞서게 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반기술로 꼽히는 블록체인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정부의 블록체인 시범사업에 참여한 한 업체 관계자는 “정부의 요구사항이 점차 늘어나며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프로젝트가 망가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시작은 프라이빗 블록체인 기반 시범 사업이었지만, 결과는 (그보다 못한) 분산 데이터베이스(DB) 구축이었다”며 “정부 관계자들이 블록체인 활용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과학기술정통부는 서울 역삼동에서 테크비즈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블록체인 규제개선 연구반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와 정연택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기존 시스템을 블록체인으로 전환하면 ROI(투자자본수익률)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화된 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있기에 교체해도 얻을 장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은 정보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현재 시스템을 블록체인 기반 분산화 시스템으로 바꾸는 비용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중국이나 아프리카처럼 기존 시스템이 없으면 바로 갈 수 있는데, 우리는 ROI가 안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도 “정부가 이미 구축해둔 중앙화된 전산 시스템이 있는데 이를 분산화로 바꿀 ROI(투자자본수익률)가 나오겠느냐는 문제가 있다”며 “한국 법제와 정부가 중앙화된 전산체계를 만들도록 하는 상황이라 블록체인의 이용성에 의문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대한민국 전자정부 시스템은 전 세계 벤치마킹 대상이 될 정도로 우수성을 자랑한다. 한국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국가에서 연수단을 꾸려 방한하고 한국의 전자정부 모델은 해외로 수출되는 상황이다. 뽑아내기에는 ‘박힌 돌’이 너무 깊고 반듯하게 있는 셈이다.
19일 국회에서 열린 ‘블록체인 시대의 ICT 혁신정책’ 세미나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윤종수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우리나라처럼 기존 방법이 잘 짜인 나라에는 블록체인이 들어오기 힘들다”며 “중앙집권체제에서 큰 부패 없이 잘 운영되는데 기존 시스템을 버리고 옮겨가기 쉽지 않다”고 평가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
지난 20일 택시업계가 카풀 도입에 반대하며 여의도에서 집회를 연 게 대표적이다.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 전국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등 전국 택시 단체가 참여했고 전국적인 택시 파업 사태가 빚어졌다.
택시업계의 카풀 반대는 지난 2013년 우버가 국내 서비스를 선보이며 시작됐다. 이후로도 풀러스, 럭시 등의 카풀앱이 등장했지만 이슈가 되진 못했다. 어디서나 택시를 쉽게 탈 수 있기에 사용자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던 탓이다.
사실 한국의 택시는 꽤 사용하기 편리했다. 어느 택시를 타도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고 현금은 물론 신용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과거에는 목적지를 빙 둘러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비게이션이 보급된 이후로는 그런 우려도 많이 줄었다. 승차거부 역시 밤 시간대로 제한된 문제다.
때문에 국내 카풀 서비스가 등장한 것은 2013년이었지만, 지난해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에서 카풀을 주요 의제로 삼은 후에야 택시업계와의 갈등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국과 비슷하게 우버를 접한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2012년 동남아시아판 우버를 만들겠다며 운전자 40명으로 시작한 그랩은 6년 만에 동남아 차량호출 서비스 시장 75%를 점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랩의 경우 택시 기사도 호출할 수 있도록 하며 현지 택시업계를 흡수했다. 호출하기 힘들고 바가지요금과 낙후한 서비스 등으로 악평을 샀던 현지 택시업계는 그랩을 통해 사용성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기존 서비스가 제 역할을 못했기에 혁신을 빠르게 추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기존 서비스가 잘 구축된 탓에 혁신이 멈춘 상황은 핀테크에서도 발견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신용카드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지급수단 79.1%를 차지했고 직불·체크카드도 56.7%에 달했다. 도심 곳곳에서 은행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금융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그 결과로 올해 2분기 국내 간편결제 시장은 하루 평균 1174억원 규모에 그쳤다. 신용카드가 보편화된 탓에 간편결제의 필요성을 늦게 인지했고, 같은 이유로 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도 방치한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시중에 유통되는 위조지폐가 많고 금융 인프라도 낙후된 상황이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중국의 1인당 보유 신용카드는 0.33장으로 3명 중 1명만 신용카드를 보유했다. 인구 10만 명당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수와 은행 지점 수 역시 37.51개, 7.7개에 그쳤다. 결국 중국의 신용카드 시장은 성장하지 못했다. 대신 지난해 거래액이 15조4000억 달러(약 1경7400조원)에 달할 정도로 간편결제 시장이 확대됐다. 중국 저장대학교 인터넷 금융 아카데미 시나이랩이 매긴 글로벌 핀테크 도시 순위에서 서울은 16위에 그쳤는데, 베이징·상하이·항저우·심천은 각각 1·3·6·7위를 차지했다. 중국이 신용카드를 건너뛰며 핀테크 진화를 하자 서울보다 앞서게 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반기술로 꼽히는 블록체인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정부의 블록체인 시범사업에 참여한 한 업체 관계자는 “정부의 요구사항이 점차 늘어나며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프로젝트가 망가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시작은 프라이빗 블록체인 기반 시범 사업이었지만, 결과는 (그보다 못한) 분산 데이터베이스(DB) 구축이었다”며 “정부 관계자들이 블록체인 활용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과학기술정통부는 서울 역삼동에서 테크비즈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블록체인 규제개선 연구반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와 정연택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기존 시스템을 블록체인으로 전환하면 ROI(투자자본수익률)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화된 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있기에 교체해도 얻을 장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은 정보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현재 시스템을 블록체인 기반 분산화 시스템으로 바꾸는 비용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중국이나 아프리카처럼 기존 시스템이 없으면 바로 갈 수 있는데, 우리는 ROI가 안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도 “정부가 이미 구축해둔 중앙화된 전산 시스템이 있는데 이를 분산화로 바꿀 ROI(투자자본수익률)가 나오겠느냐는 문제가 있다”며 “한국 법제와 정부가 중앙화된 전산체계를 만들도록 하는 상황이라 블록체인의 이용성에 의문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대한민국 전자정부 시스템은 전 세계 벤치마킹 대상이 될 정도로 우수성을 자랑한다. 한국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국가에서 연수단을 꾸려 방한하고 한국의 전자정부 모델은 해외로 수출되는 상황이다. 뽑아내기에는 ‘박힌 돌’이 너무 깊고 반듯하게 있는 셈이다.
19일 국회에서 열린 ‘블록체인 시대의 ICT 혁신정책’ 세미나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윤종수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우리나라처럼 기존 방법이 잘 짜인 나라에는 블록체인이 들어오기 힘들다”며 “중앙집권체제에서 큰 부패 없이 잘 운영되는데 기존 시스템을 버리고 옮겨가기 쉽지 않다”고 평가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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