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고등학교 재학 시절 작은 뮤지컬 공연에 출연했고, 대학 입학 시에도 교사를 염두에 두며 성악이 아닌 성악교육을 전공으로 택했다.
미국 공영방송 PBS로 중계된 '돈 조반니' 공연을 본 뒤 완전히 오페라에 매료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세계 최정상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프리마돈나가 될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다음 달 첫 내한을 앞둔 미국 출신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49)의 데뷔 전 이야기다.
이탈리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공연을 TV로 지켜보며 꿈을 키운 그는 현재 바르톨리아와 세계 메조소프라노계를 양분하는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유럽에 바르톨리가 있다면 미국엔 디도나토가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다.
디도나토는 27일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바르톨리는 나를 사로잡은 첫 번째 오페라 가수였지만, 당시만 해도 내가 지금까지 누리는 기회들을 갖게 될 거라 꿈도 꾸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성악가로서의 성공은 다른 디바들에 비교해 더디게 이뤄진 편이다.
그는 성악가로 꿈을 변경한 뒤에도 번번이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92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보컬 아카데미에 등록했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1995년 산타페 오페라단 신인 육성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합창, 단역, 임시대역 등을 경험했을 뿐이었다.
이듬해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단 신인 프로그램에 합류하며 몇몇 콩쿠르에서 수상하기도 했지만, 역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진 못했다.
당시 디도나토 재능을 눈여겨본 한 영국 에이전트는 16일 동안 유럽 전역에서 13번 오디션을 보게 했지만, 콧대 높은 유럽 극장들은 그에게 "너무 미국적"이라는 혹평을 내놓았다.
그의 가능성을 발견한 곳은 13번째 오디션 장소였던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이었다.
그는 오디션을 마치고 15분 만에 '세비야의 이발사' 로시나 역으로 캐스팅됐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이 같은 소식은 다른 극장들에도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그는 바스티유 데뷔에 앞서 로시니 오페라 '신데렐라'로 밀라노 라 스칼라 데뷔를 이뤄냈다.
이같이 돌고 도는 과정을 거치느라 '꿈의 무대'로 통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 데뷔했을 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디도나토는 "내가 밟은 모든 과정은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이런 비범한 경험들에 대해 끝없이 감사한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는 세계적 오페라 무대에서의 특출난 활약과 더불어 그래미상과 올리비에상 등 화려한 수상 이력도 자랑한다.
디도나토가 현재의 자리에 오른 비결은 물론 탁월한 가창력과 출중한 연기력에 있겠지만, 특유의 도전정신과 열정도 빠뜨릴 수 없다.
디도나토는 2009년 영국 코벤트 가든에서 로시니 오페라 공연 도중 다리를 다쳤지만, 휠체어를 타고 나와 예정된 공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핑크 깁스를 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한 그는 "장애물이 생기면 생길수록 더 힘이 난다"고 말하는 '캔디형' 음악가다.
그는 "역경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것에 방해받지 말라. 우리는 스스로가 믿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잘 견뎌내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이번 첫 내한공연은 2017년 발매한 음반 '인 워 & 피스(In War & Peace)'에 수록된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꾸민다.
그라모폰상을 수상한 앨범이다.
헨델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등 바로크 시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아리아들을 듣는다.
2012년 창단한 고음악 전문 연주단체 일 포모 도로 앙상블이 함께한다.
2006년부터 이 앙상블을 이끈 러시아 출신 막심 에멜랴니체프가 지휘봉을 잡는다.
디도나토는 이번 프로그램에 대해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자 나만의 방식으로 시도하고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주변에서 많은 혼란과 잔혹함을 목격하게 되지만 음악이 평화의 전령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