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내년부터 ‘일 잘하는’ 엔지니어에 한해 60세 정년을 없앤다. 또 매년 두 차례 정해진 비율대로 직원들의 고과를 S, A, B, C로 매기는 상대평가제를 2020년 폐지하고, 프로젝트별 절대평가제로 대체한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사장·사진)는 27일 경기 이천캠퍼스에서 임직원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왁자지껄 콘서트’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CEO 공감경영 선언’을 발표했다.

“정년 걱정 말고 일에 매진해 달라”

SK하이닉스가 우수 엔지니어에 대해 ‘무(無)정년’ 제도를 도입한 건 30년가량 반도체 개발·제조 기술을 익힌 ‘베테랑’들의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다. 숙련된 엔지니어들의 중국행(行)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란 해석도 나온다.

무정년 제도의 대상은 반도체 개발·제조 부문에서 일하는 1만 명 안팎의 엔지니어들이다. 나머지 1만5000명에 달하는 일반 사무직이나 생산직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임원도 제외된다.

SK하이닉스는 내년에 60세 정년이 돌아오는 엔지니어 가운데 무정년 대상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구체적인 선정 기준과 규모, 급여 수준 등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무정년 대상자가 되면 계약직으로 신분이 전환돼 매년 회사와 근로계약을 맺는 식으로 정년을 연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임금피크제 마지막 해의 급여와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58세부터 3년 동안 매년 10%씩 임금을 낮춰 60세에는 57세 때 주던 급여의 70%가량을 지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베테랑들의 기술 노하우를 살리는 동시에 중국 유출도 저지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린 것”이라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삼성전자 등으로 향후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문화 속속 도입

이번에 발표한 신(新)인사시스템은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의 조직문화를 둘러본 직원들 제안으로 이뤄졌다. 지난 9월 30여 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은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넷플릭스 인텔 등을 방문해 이들 기업의 기업문화 및 인사제도를 배웠다. 인텔에서 10년간 근무하며 실리콘밸리 문화를 몸으로 익힌 이 사장은 이들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번에 도입된 상대평가 폐지는 “직원을 줄 세우지 않는다”는 넷플릭스에서 얻은 아이디어다. 넷플릭스는 직원 간 과도한 경쟁이 협업체계를 무너뜨려 오히려 조직에 해가 된다는 판단에 따라 상대평가를 하지 않는다. 4단계(사원·선임·책임·수석)였던 직원 호칭을 TL 하나로 단순화한 건 “권력과 권위는 직원들의 창의성을 가로막는다”는 인텔의 인사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TL은 ‘기술 리더(technical leader)’이자 ‘재능 있는 리더(talented leader)’를 뜻한다.

이 사장이 분기마다 임직원들과 경영 설명회를 하고, 수시로 ‘왁자지껄 콘서트’를 여는 건 구글과 비슷하다. 구글은 금요일마다 CEO 등 경영진이 임직원들과 간담회를 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4월 SK하이닉스가 실시한 ‘실패 경진대회’도 “실패를 통해 배운다”며 페일콘(failure conference·실패회의)을 여는 실리콘밸리 기업문화 중 하나다.

업계 관계자는 “우수 엔지니어에 대해 무정년 제도를 도입한 것도 기술만 있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고용을 유지하는 실리콘밸리 문화의 하나”라며 “실리콘밸리 출신 CEO가 부임한 데다 500명 안팎인 실리콘밸리 인력을 3년 내 두 배로 늘리기로 한 만큼 SK하이닉스 조직문화에 ‘실리콘밸리 바람’이 거세게 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상헌/고재연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