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코노미] "진흙 속에서 진주 발견"…'전세난민'에서 18억 집주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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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련 성공기 (23)
“집값 오르더니 걸음걸이도 달라진 것 같은데?”
이모 씨(40)가 요즘 직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녀가 몇 년 전 마련한 첫 아파트의 가격이 최근 무섭게 올라서다. 그녀는 5년 전 미분양으로 남아있던 분양권을 ‘마이너스 프리미엄(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을 주고 샀다. 지금은 매입가보다 10억원이나 급등했다. 서울 마포구 일대에서 ‘대장 아파트’로 불리는 ‘마포래미안푸르지오’가 이 씨의 집이다.
이 씨가 남들보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다. 저렴한 전셋집을 찾아 2년마다 집을 옮겨다니는 흔한 전세난민이 바로 그녀였다. 20년 전 대학생 때 상경한 이후 줄곧 전세살이는 지긋지긋한 숙명이었다. 여동생과 함께 여댓 번은 족히 둥지를 옮겨다녔다. 대동여지도라도 만드는 것이냐고 서로 한탄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싼 전셋집을 구하는 요령도 생겼다. 옛 잠실주공1단지(‘잠실엘스’)처럼 낡아서 재건축을 앞두고 있거나 준공 후 미분양이 난 신축 아파트의 전세가 저렴했다. 신축 단지는 잔금이 급한 집주인들이 경쟁적으로 전셋값을 낮춰 부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입주할 수 있었다.
결혼이 인생역전은 아니었다. 2009년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은 뒤에도 이 씨의 전세살이는 계속됐다. 이 씨는 남편과 오피스텔에 단출한 신접살림을 차렸다. 별다른 세간 없이 두 몸뚱이만으로도 단칸방은 좁았다. 목돈이 얼마 모였을 때야 과천의 주공7단지로 이사했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 전세가 저렴한 데다 남편의 직장인 강남도 멀지 않아서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 회사가 공덕역 인근으로 이전했다. 과천으로 봇짐을 쌀 때 남편이 주장하던 ‘직주근접’이 사라진 것이다. 부부는 다시 이사를 논의한 뒤 결국 홍제동의 한 아파트 전세로 옮겼다. 광화문이 직장이던 이 씨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웬수 같은 남편 배려한답시고 지하철에서 버린 시간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쯤 마포에선 재개발 바람이 한창 불고 있었다. 아현동과 염리동 일대 낡은 다세대주택들이 온데간데 없어졌고 곳곳에선 크레인이 아파트를 쌓아올렸다. 이 씨의 남편은 일대 새로 생기는 아파트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직장과 가까워서였다. 급기야 하루는 모델하우스로 그녀를 납치하기도 했다. “도심에서 매일같이 소음과 매연에 시달려야 할 텐데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거니!” 이 씨는 그런 남편이 얄미워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남편이 관심을 가진 전용면적 114㎡(옛 40평형대) 주택형은 분양가만 8억원이 넘었다. ‘넘볼 수 있는 걸 넘봐야지.’ 그녀는 청약하겠다던 남편을 한사코 만류했다. 그 아파트가 1순위 청약경쟁률 0.48 대 1을 기록하며 미달됐을 땐 남편에게 큰 소리도 쳤다. “거봐, 당신은 집 보는 눈이 없다니까.” 이 씨는 몰랐다. 자신의 집이 될 줄. 그러나 2년가량 지난 뒤 이 씨 부부는 다시 내 집 마련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배 속에 둘째 아이가 생겨서다. 첫 아이는 애타는 부모의 마음을 기다려주지도 않고 쑥쑥 자랐다. 아이 하나일 때야 업고 옮겨다니는 건 일도 아니지만 둘일 땐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이 씨의 주변에서 우려했다. 2년마다 전학만 다니다 친구도 남지 않고 성적도 망칠 것이란 얘기도 적잖이 들렸다. 그런데 당시는 부동산시장이 박살나고 있다는 뉴스가 쉴새없이 쏟아지던 때였다. 이 씨는 나름 부동산 투자를 좀 해봤다는 회사 선배에게 물었다가 “정말 지금 집을 사려고?”라는 답을 들었다.
남편은 달랐다. 아이들 자랄 때를 생각해서 한시라도 빨리 집을 사야하고, 기왕이면 큰 면적대를 사야한다고 이 씨를 채근했다. 집은 원래 대출로 사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씨익 웃으면서.
이 씨가 조금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남편은 알아서 아파트 조사를 척척 해왔다. 상암동과 아현동의 대형 아파트들을 정리해서 그녀에게 보여줬다. 아현동 아파트는 갓 지어진 아파트였는데 미분양이 있었다. 주변 중개업소에 전화를 돌려보니 매물이 많았다.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붙어 분양가 대비 3000만원 정도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날부터 집을 보러 다녔다. 신축 아파트를 한 번 구경하니 상암동 아파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 계약까지 순식간에 진행됐다. 이 씨는 이따금 너무 큰 집을 산 게 아닌가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별이 다르다면 각자 방을 줘야 할 테고 나중에 시부모님을 모시게 될 상황까지 고려하면 크다고 할 수도 없었다. 3.3㎡(평)당 가격을 따져보면 중·소형 면적대를 살 때 오히려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결국 분양가 8억원이 훌쩍 넘던 집을 7억8500만원에 계약했다. 살던 집 전세보증금 3억원에 그간 모은 돈 1억원을 보태고 나머지는 대출로 돈을 융통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대출도 많이 나왔다. 이 씨는 수억원짜리 담보대출에 덜컥 겁부터 났지만 남편은 대출도 자산이라며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4000가구가 넘는 대단지의 한가운데 있는 데다 앞마당을 정원처럼 쓸 수 있는 저층이었다. 아이들이 뛰놀기 좋을 터였다. 중·고층 집들은 시야가 앞 동에 막힌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전망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잔금을 치를 때쯤 남편이 고백했다. “사실 모델하우스 개장 때 우리가 이 단지를 보러왔었어.” 아파트의 이름은 마포래미안푸르지오였다. 도대체 누가 살까 싶던 그 아파트. 매도하고 나가던 집주인도 이 씨를 놀렸다. 그는 “그간 집이 안 팔려 너무 고생했다”며 이 가격에라도 처분한 게 무척 이득을 본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기분이 나빴지만 기왕 내 집이 된 마당에 오래도록 예쁘게 살아야겠다고 이 씨는 결심했다. 2014년 12월이었다. 살다 보니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이 장점으로 느껴졌다. 대로변에 있어 매일 소음과 매연에 시달릴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단지가 워낙 큰 탓에 바깥 소음은 들리지도 않았고 곳곳이 정원처럼 꾸며져 고즈넉했다. 사우나와 헬스장 등 웬만한 커뮤니티 시설이 단지 안으로 들어와 있어 바깥으로 나갈 일은 많지 않았다. 어린이집도 단지마다 하나씩 있었다. 퍼즐을 맞추듯 주변이 하나둘 재개발돼 주변 환경이 정비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서울 어디든 이동이 쉽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5호선 애오개역과 2호선 이대역, 아현역을 걸어서 이용할 수 있어 못 가는 곳이 없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강남·북 어디든 가까웠다. 도심이어서 무엇이든 손쉽고 가깝게 이용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이 씨의 직장까진 고작 10분 남짓 걸렸다. 그녀는 직주근접의 위력을 실감했다. 남편은 공덕동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유일한 단점은 구릉지에 들어서 언덕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학군 문제로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종종 있다. 이 씨 역시 교육환경에 초점을 맞춰 레이더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부를 미친듯이 시켜서 의사나 변호사, 교수를 시킬 요량도 아니다. 전쟁하듯 산다면 과연 아이가 행복할까 싶은 게 이 씨의 생각이다. 다행히 최근엔 주변에 좋은 학원들이 하나둘 생겨 적당히 공부를 시킬 수 있는 환경이 됐다.
그새 집값은 무섭게 올랐다. 지난 가을엔 실거래가가 16억원을 넘어섰다. 호가는 18억까지 올랐다. 이 씨가 샀던 가격과 비교하면 10억원가량 오른 셈이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실감됐다. 집을 처분하고 큰돈을 쥐어 나가는 사람들도 여럿 나왔다. 이 씨 부부도 전혀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집값도 오른 데다 비슷한 조건의 아파트를 찾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직장과 집이 가까워지면서 높아진 삶의 질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자연히 늘어나서다. 주말마다 만나는 단지 내 ‘육아맘’들도 이 같은 문제로 집을 팔지 않았다.
최근엔 서울 부동산시장의 상승세가 주춤하면서 진작 집을 파는 게 낫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부채질이 만만찮다. 이 씨는 그때마다 예전 집주인이 남겼던 마지막 말을 상기한다. “‘똘똘한 한 채’를 남기고 나머지를 제게 판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때는 몰랐는데 이젠 똘똘한 한 채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아요. 부침은 있겠지만 나중엔 더 오르지 않겠어요?”
정리=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
이모 씨(40)가 요즘 직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녀가 몇 년 전 마련한 첫 아파트의 가격이 최근 무섭게 올라서다. 그녀는 5년 전 미분양으로 남아있던 분양권을 ‘마이너스 프리미엄(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을 주고 샀다. 지금은 매입가보다 10억원이나 급등했다. 서울 마포구 일대에서 ‘대장 아파트’로 불리는 ‘마포래미안푸르지오’가 이 씨의 집이다.
이 씨가 남들보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다. 저렴한 전셋집을 찾아 2년마다 집을 옮겨다니는 흔한 전세난민이 바로 그녀였다. 20년 전 대학생 때 상경한 이후 줄곧 전세살이는 지긋지긋한 숙명이었다. 여동생과 함께 여댓 번은 족히 둥지를 옮겨다녔다. 대동여지도라도 만드는 것이냐고 서로 한탄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싼 전셋집을 구하는 요령도 생겼다. 옛 잠실주공1단지(‘잠실엘스’)처럼 낡아서 재건축을 앞두고 있거나 준공 후 미분양이 난 신축 아파트의 전세가 저렴했다. 신축 단지는 잔금이 급한 집주인들이 경쟁적으로 전셋값을 낮춰 부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입주할 수 있었다.
결혼이 인생역전은 아니었다. 2009년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은 뒤에도 이 씨의 전세살이는 계속됐다. 이 씨는 남편과 오피스텔에 단출한 신접살림을 차렸다. 별다른 세간 없이 두 몸뚱이만으로도 단칸방은 좁았다. 목돈이 얼마 모였을 때야 과천의 주공7단지로 이사했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 전세가 저렴한 데다 남편의 직장인 강남도 멀지 않아서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 회사가 공덕역 인근으로 이전했다. 과천으로 봇짐을 쌀 때 남편이 주장하던 ‘직주근접’이 사라진 것이다. 부부는 다시 이사를 논의한 뒤 결국 홍제동의 한 아파트 전세로 옮겼다. 광화문이 직장이던 이 씨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웬수 같은 남편 배려한답시고 지하철에서 버린 시간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쯤 마포에선 재개발 바람이 한창 불고 있었다. 아현동과 염리동 일대 낡은 다세대주택들이 온데간데 없어졌고 곳곳에선 크레인이 아파트를 쌓아올렸다. 이 씨의 남편은 일대 새로 생기는 아파트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직장과 가까워서였다. 급기야 하루는 모델하우스로 그녀를 납치하기도 했다. “도심에서 매일같이 소음과 매연에 시달려야 할 텐데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거니!” 이 씨는 그런 남편이 얄미워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남편이 관심을 가진 전용면적 114㎡(옛 40평형대) 주택형은 분양가만 8억원이 넘었다. ‘넘볼 수 있는 걸 넘봐야지.’ 그녀는 청약하겠다던 남편을 한사코 만류했다. 그 아파트가 1순위 청약경쟁률 0.48 대 1을 기록하며 미달됐을 땐 남편에게 큰 소리도 쳤다. “거봐, 당신은 집 보는 눈이 없다니까.” 이 씨는 몰랐다. 자신의 집이 될 줄. 그러나 2년가량 지난 뒤 이 씨 부부는 다시 내 집 마련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배 속에 둘째 아이가 생겨서다. 첫 아이는 애타는 부모의 마음을 기다려주지도 않고 쑥쑥 자랐다. 아이 하나일 때야 업고 옮겨다니는 건 일도 아니지만 둘일 땐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이 씨의 주변에서 우려했다. 2년마다 전학만 다니다 친구도 남지 않고 성적도 망칠 것이란 얘기도 적잖이 들렸다. 그런데 당시는 부동산시장이 박살나고 있다는 뉴스가 쉴새없이 쏟아지던 때였다. 이 씨는 나름 부동산 투자를 좀 해봤다는 회사 선배에게 물었다가 “정말 지금 집을 사려고?”라는 답을 들었다.
남편은 달랐다. 아이들 자랄 때를 생각해서 한시라도 빨리 집을 사야하고, 기왕이면 큰 면적대를 사야한다고 이 씨를 채근했다. 집은 원래 대출로 사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씨익 웃으면서.
이 씨가 조금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남편은 알아서 아파트 조사를 척척 해왔다. 상암동과 아현동의 대형 아파트들을 정리해서 그녀에게 보여줬다. 아현동 아파트는 갓 지어진 아파트였는데 미분양이 있었다. 주변 중개업소에 전화를 돌려보니 매물이 많았다.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붙어 분양가 대비 3000만원 정도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날부터 집을 보러 다녔다. 신축 아파트를 한 번 구경하니 상암동 아파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 계약까지 순식간에 진행됐다. 이 씨는 이따금 너무 큰 집을 산 게 아닌가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별이 다르다면 각자 방을 줘야 할 테고 나중에 시부모님을 모시게 될 상황까지 고려하면 크다고 할 수도 없었다. 3.3㎡(평)당 가격을 따져보면 중·소형 면적대를 살 때 오히려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결국 분양가 8억원이 훌쩍 넘던 집을 7억8500만원에 계약했다. 살던 집 전세보증금 3억원에 그간 모은 돈 1억원을 보태고 나머지는 대출로 돈을 융통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대출도 많이 나왔다. 이 씨는 수억원짜리 담보대출에 덜컥 겁부터 났지만 남편은 대출도 자산이라며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4000가구가 넘는 대단지의 한가운데 있는 데다 앞마당을 정원처럼 쓸 수 있는 저층이었다. 아이들이 뛰놀기 좋을 터였다. 중·고층 집들은 시야가 앞 동에 막힌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전망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잔금을 치를 때쯤 남편이 고백했다. “사실 모델하우스 개장 때 우리가 이 단지를 보러왔었어.” 아파트의 이름은 마포래미안푸르지오였다. 도대체 누가 살까 싶던 그 아파트. 매도하고 나가던 집주인도 이 씨를 놀렸다. 그는 “그간 집이 안 팔려 너무 고생했다”며 이 가격에라도 처분한 게 무척 이득을 본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기분이 나빴지만 기왕 내 집이 된 마당에 오래도록 예쁘게 살아야겠다고 이 씨는 결심했다. 2014년 12월이었다. 살다 보니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이 장점으로 느껴졌다. 대로변에 있어 매일 소음과 매연에 시달릴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단지가 워낙 큰 탓에 바깥 소음은 들리지도 않았고 곳곳이 정원처럼 꾸며져 고즈넉했다. 사우나와 헬스장 등 웬만한 커뮤니티 시설이 단지 안으로 들어와 있어 바깥으로 나갈 일은 많지 않았다. 어린이집도 단지마다 하나씩 있었다. 퍼즐을 맞추듯 주변이 하나둘 재개발돼 주변 환경이 정비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서울 어디든 이동이 쉽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5호선 애오개역과 2호선 이대역, 아현역을 걸어서 이용할 수 있어 못 가는 곳이 없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강남·북 어디든 가까웠다. 도심이어서 무엇이든 손쉽고 가깝게 이용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이 씨의 직장까진 고작 10분 남짓 걸렸다. 그녀는 직주근접의 위력을 실감했다. 남편은 공덕동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유일한 단점은 구릉지에 들어서 언덕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학군 문제로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종종 있다. 이 씨 역시 교육환경에 초점을 맞춰 레이더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부를 미친듯이 시켜서 의사나 변호사, 교수를 시킬 요량도 아니다. 전쟁하듯 산다면 과연 아이가 행복할까 싶은 게 이 씨의 생각이다. 다행히 최근엔 주변에 좋은 학원들이 하나둘 생겨 적당히 공부를 시킬 수 있는 환경이 됐다.
그새 집값은 무섭게 올랐다. 지난 가을엔 실거래가가 16억원을 넘어섰다. 호가는 18억까지 올랐다. 이 씨가 샀던 가격과 비교하면 10억원가량 오른 셈이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실감됐다. 집을 처분하고 큰돈을 쥐어 나가는 사람들도 여럿 나왔다. 이 씨 부부도 전혀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집값도 오른 데다 비슷한 조건의 아파트를 찾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직장과 집이 가까워지면서 높아진 삶의 질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자연히 늘어나서다. 주말마다 만나는 단지 내 ‘육아맘’들도 이 같은 문제로 집을 팔지 않았다.
최근엔 서울 부동산시장의 상승세가 주춤하면서 진작 집을 파는 게 낫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부채질이 만만찮다. 이 씨는 그때마다 예전 집주인이 남겼던 마지막 말을 상기한다. “‘똘똘한 한 채’를 남기고 나머지를 제게 판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때는 몰랐는데 이젠 똘똘한 한 채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아요. 부침은 있겠지만 나중엔 더 오르지 않겠어요?”
정리=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