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전구, 디자인·SNS 마케팅으로 '사양산업' 늪에서 살아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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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중소기업 위기탈출
57년 된 대구의 중소기업
다른 기업 LED로 돌아설 때 장식용·파티용 백열전구 개발
구호·아우디와 협업…카페도 열어
젊은층서 '핫한 전구' 입소문
57년 된 대구의 중소기업
다른 기업 LED로 돌아설 때 장식용·파티용 백열전구 개발
구호·아우디와 협업…카페도 열어
젊은층서 '핫한 전구' 입소문
2019년 한국의 중소기업은 어려운 한 해를 보낼 것이라고들 한다. 악재는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뿐만이 아니다. 사업 자체가 사양산업이라 어려울 수도 있고,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회사도 있다. 또 저출산은 수많은 기업을 한계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잡초와 같다고 했다. 공터만 있으면 정착하고, 비가 오면 무성해진다.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사양산업, 레드오션, 저출산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회사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지난해 말 어느 저녁 서울 이태원에 있는 패션브랜드 구호의 플래그십 스토어. 주광색 조명이 실내를 밝히고 있다. 패션 스토어라기보다 조명 가게에 가까운 느낌이다. 구호가 국내 마지막 남은 백열전구 제조업체 일광전구와 협업한 결과다. 구호는 일광전구의 로고를 활용한 제품을 출시하고, 매장에서 일광 스토리를 담은 전시회를 열고 있다.
대구에 있는 일광전구는 1962년부터 백열전구를 생산했다. 2000년대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이 확산되자 위기를 맞았다. ‘번개표’ 브랜드로 유명한 금호전기, 남영전구 등 경쟁사는 백열전구사업을 접었다. 하지만 일광전구는 살아남았다. 백열전구에 디자인과 문화를 입히는 전략이 통했다.
젊은이의 매체를 활용하라
백열전구는 비효율적인 조명이다. 전력 사용량 중 5%만 빛을 내는 데 사용한다. 95%는 열에너지로 발산하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잘나가던 전구업체들은 2014년 정부의 가정용 생산 및 수입 금지 조치에 따라 대부분 LED로 돌아섰다.
일광전구도 마찬가지 처지였지만 다른 길을 갔다. 1998년 가업을 이어받은 김홍도 일광전구 대표는 경쟁사가 백열전구 사업을 포기할 때 돌파구를 모색했다. “디자인을 입히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분기점이 된 것은 2013년이다. 외부 디자이너로 협업하던 권순만 디자인팀장을 영입해 브랜드 총괄을 맡겼다. 권 팀장은 삼파장·크립톤 등 생산자 중심의 기술적 용어부터 바꿨다. 소비자가 용도에 따라 전구를 고를 수 있도록 클래식·장식용·파티용 등으로 분류했다. 클래식 전구는 C, 장식용 전구는 D, 파티 조명은 P 등으로 알기 쉽게 표기했다. 소비자 취향에 맞춰 상품 종류는 늘리고 생산량은 줄였다. 필라멘트를 여러 번 꼬거나 전구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깎는 등 파격적인 디자인의 제품도 선보였다. 유물로 취급받던 백열전구를 빈티지 제품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 전략에 젊은이들이 반응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유니크한(독특한) 전구가 갖고 싶으면 일광을 찾으라’는 입소문이 났다. 일광전구 관계자는 “과거 100종의 전구를 하루 6만 개 생산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300종 이상의 전구를 1만5000개 제작한다”며 “디자인을 입혀 부가가치를 높이자 수익성도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부터 생산설비를 자동화한 것도 수익성 향상에 도움이 됐다.
백열전구를 경험해보지 못한 10~20대와의 소통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본사 내부에 전담 마케팅팀을 신설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일광전구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3000명이 넘는다. 유튜브에서 일광전구 ‘언박싱 영상(포장을 풀면서 제품을 소개하는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버려진 건물 디자인 조명으로 살려
일광전구가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외부에서 협업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는 지난달 일광전구와 협업한 상품 라인 ‘아티산’을 출시했다. 이태원에 있는 구호 플래그십 스토어에서의 일광전구 전시회도 이런 차원에서 기획했다. 이곳에는 컨베이어벨트 등 전구 생산에 실제로 사용한 설비도 선보였다.
일광전구는 2015년 국내 최대 규모 음악축제인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에 조명을 설치하기도 했다. 일광전구는 야외무대의 관객석 주변을 장식용 전구로 꾸몄다. 백열전구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감상적인 인디 음악이 어우러져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9월엔 아우디와 신차 공개 행사에서 협업하기도 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낡은 공간 개조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부산 백제병원, 서울 합정동의 카페 앤트러사이트 등 오래된 건물과 버려진 공장터를 개조해 마련한 공간은 일광전구의 아날로그 감성과 잘 어울렸다. 상업적 공간이란 느낌이 옅어지자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난해 말 폐건물을 사들여 조명 전시를 겸하는 카페도 열었다. 인천 중구(동인천 개항로)에 있는 버려진 산부인과 건물을 새롭게 꾸며 ‘라이트하우스’란 이름의 카페를 개장했다. 매장 곳곳을 독특한 디자인의 백열전구로 채우고, 병원 문짝을 재활용해 테이블을 제작했다. 김 대표는 “양산 제품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는 시대”라며 “디자인과 창의적인 생각으로 100년 기업을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만/안효주 기자 mgk@hankyung.com
지난해 말 어느 저녁 서울 이태원에 있는 패션브랜드 구호의 플래그십 스토어. 주광색 조명이 실내를 밝히고 있다. 패션 스토어라기보다 조명 가게에 가까운 느낌이다. 구호가 국내 마지막 남은 백열전구 제조업체 일광전구와 협업한 결과다. 구호는 일광전구의 로고를 활용한 제품을 출시하고, 매장에서 일광 스토리를 담은 전시회를 열고 있다.
대구에 있는 일광전구는 1962년부터 백열전구를 생산했다. 2000년대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이 확산되자 위기를 맞았다. ‘번개표’ 브랜드로 유명한 금호전기, 남영전구 등 경쟁사는 백열전구사업을 접었다. 하지만 일광전구는 살아남았다. 백열전구에 디자인과 문화를 입히는 전략이 통했다.
젊은이의 매체를 활용하라
백열전구는 비효율적인 조명이다. 전력 사용량 중 5%만 빛을 내는 데 사용한다. 95%는 열에너지로 발산하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잘나가던 전구업체들은 2014년 정부의 가정용 생산 및 수입 금지 조치에 따라 대부분 LED로 돌아섰다.
일광전구도 마찬가지 처지였지만 다른 길을 갔다. 1998년 가업을 이어받은 김홍도 일광전구 대표는 경쟁사가 백열전구 사업을 포기할 때 돌파구를 모색했다. “디자인을 입히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분기점이 된 것은 2013년이다. 외부 디자이너로 협업하던 권순만 디자인팀장을 영입해 브랜드 총괄을 맡겼다. 권 팀장은 삼파장·크립톤 등 생산자 중심의 기술적 용어부터 바꿨다. 소비자가 용도에 따라 전구를 고를 수 있도록 클래식·장식용·파티용 등으로 분류했다. 클래식 전구는 C, 장식용 전구는 D, 파티 조명은 P 등으로 알기 쉽게 표기했다. 소비자 취향에 맞춰 상품 종류는 늘리고 생산량은 줄였다. 필라멘트를 여러 번 꼬거나 전구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깎는 등 파격적인 디자인의 제품도 선보였다. 유물로 취급받던 백열전구를 빈티지 제품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 전략에 젊은이들이 반응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유니크한(독특한) 전구가 갖고 싶으면 일광을 찾으라’는 입소문이 났다. 일광전구 관계자는 “과거 100종의 전구를 하루 6만 개 생산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300종 이상의 전구를 1만5000개 제작한다”며 “디자인을 입혀 부가가치를 높이자 수익성도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부터 생산설비를 자동화한 것도 수익성 향상에 도움이 됐다.
백열전구를 경험해보지 못한 10~20대와의 소통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본사 내부에 전담 마케팅팀을 신설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일광전구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3000명이 넘는다. 유튜브에서 일광전구 ‘언박싱 영상(포장을 풀면서 제품을 소개하는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버려진 건물 디자인 조명으로 살려
일광전구가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외부에서 협업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는 지난달 일광전구와 협업한 상품 라인 ‘아티산’을 출시했다. 이태원에 있는 구호 플래그십 스토어에서의 일광전구 전시회도 이런 차원에서 기획했다. 이곳에는 컨베이어벨트 등 전구 생산에 실제로 사용한 설비도 선보였다.
일광전구는 2015년 국내 최대 규모 음악축제인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에 조명을 설치하기도 했다. 일광전구는 야외무대의 관객석 주변을 장식용 전구로 꾸몄다. 백열전구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감상적인 인디 음악이 어우러져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9월엔 아우디와 신차 공개 행사에서 협업하기도 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낡은 공간 개조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부산 백제병원, 서울 합정동의 카페 앤트러사이트 등 오래된 건물과 버려진 공장터를 개조해 마련한 공간은 일광전구의 아날로그 감성과 잘 어울렸다. 상업적 공간이란 느낌이 옅어지자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난해 말 폐건물을 사들여 조명 전시를 겸하는 카페도 열었다. 인천 중구(동인천 개항로)에 있는 버려진 산부인과 건물을 새롭게 꾸며 ‘라이트하우스’란 이름의 카페를 개장했다. 매장 곳곳을 독특한 디자인의 백열전구로 채우고, 병원 문짝을 재활용해 테이블을 제작했다. 김 대표는 “양산 제품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는 시대”라며 “디자인과 창의적인 생각으로 100년 기업을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만/안효주 기자 m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