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쟁사와 싸울 시간도 모자란데…지배구조 그림만 그리다 날샐 판"
“기업마다 지배구조 개편에 매몰돼 에너지와 돈을 쏟아붓고 있다. 글로벌 경쟁사와 싸우는 데 온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엉뚱한 데 공을 들이고 있다.”(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기업 대주주의 경영권을 약화시키는 내용의 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과잉 입법’이다. 정부가 ‘규범적 행동’을 유도해야 할 일에 무조건 ‘법’이란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곤혹스러운 삼성·현대자동차

경제계를 대표하는 두 경제단체장이 연말연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쏟아낸 호소다. ‘정답’도 없는 ‘큰 그림(그룹 지배구조)’을 바꾸라는 정부의 끊이지 않는 압박에 대한 하소연이다. 삼성과 현대자동차, SK 등 간판 그룹들은 상당수 핵심 인력을 지배구조 개편 및 지분 교통정리에 투입해 ‘어려운 숙제’를 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대기업들이 정작 중장기 투자전략 수립이나 인수합병(M&A) 등 ‘본업(本業)’엔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은 지난해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골자로 한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했다. 아직 삼성전자 등 제조업부문 계열사와 삼성생명 등 금융부문 계열사 간 지분 구조를 정리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핵심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2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일부 여당 의원들은 “금융자본의 산업자본 지배를 최소화해야 한다”며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을 주장하고 있다.

삼성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삼성생명이 들고 있는 지분 중 1~3%가량을 삼성전자의 2대 주주인 삼성물산(지분율 4.65%)에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정부가 지분 매각을 더 세게 압박할 경우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대부분을 팔아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가치는 작년 말 기준으로 19조원에 달한다. 이 지분을 모두 사들일 수 있는 삼성 계열사는 없다. 삼성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현대차도 곤혹스러운 처지다. 어떻게든 올해 그룹 차원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격으로 작업을 중단했지만, 정부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다시 ‘밑그림 그리기’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자동차산업이 위기에 빠지면서 실적이 급격히 악화돼 지배구조 개편에 본격적으로 나설 여유가 없다. 그룹 관계자는 “그룹 차원의 지배구조 개편은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된 뒤 발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는 “판매 회복 등 사업에만 신경을 써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맨날 ‘그림(지배구조)’만 그리다 날이 샐 판”이라며 답답해했다.
"글로벌 경쟁사와 싸울 시간도 모자란데…지배구조 그림만 그리다 날샐 판"
지주사 ‘역차별’ 논란도

재계에선 한국을 대표하는 두 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에 매몰돼 정작 글로벌 사업 경쟁에선 점점 뒤처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나온다. 미래 먹거리 발굴에 써야 할 돈을 지배구조 이슈 때문에 자사주 매입이나 지분 정리 등에 투입하고 있어서다. 상당수 핵심 인재들을 엉뚱한 작업에 투입해 힘을 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 지배구조 개편에 내몰린 기업들이 수천억~수조원을 들여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소각하는 등 헛심을 쓰고 있다”며 “글로벌 경쟁사들과 제대로 된 경쟁이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지주회사 규제를 강화하면서 SK를 비롯해 LG, 롯데, 현대중공업 등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그룹들이 되레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한때 지주사 도입을 권장하다 이제 와서 규제를 강화하는,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으로 기업들의 혼란만 커지고 있다”며 “정부가 더 이상 개별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와중에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상법 개정안마저 국회 문턱을 넘을 경우 국내 주요 기업이 적대적 M&A 위험에 곧바로 노출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한경연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중 시가총액이 큰 30대 기업(작년 10월 말 기준)의 이사회 현황 및 지분율(2017년 말 기준)을 분석한 결과 상법 개정안에 포함된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를 함께 시행하면 7곳의 이사진 절반이 투기자본의 손에 넘어갈 공산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

장창민/좌동욱/박종관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