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금사로 둔갑한 지방 단자사의 폭주…그 끝엔 '국가부도의 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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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13) 1994년 종합금융회사 추가인가
부메랑 된 대형 종금사 육성
사채업 하던 지방 단자사에 외화 조달·여신 등 취급 허용
24곳 무더기 허가로 난립 빌미
고삐 풀린 高위험 투자
국제금융·CP 할인에 혈안, 해외증권 투자 22억弗…8배↑
정부 감독 기능은 작동 안해
대기업 도미노 부도로 공멸
7개 그룹에 빌려준 돈만 6조원…해외서 상환 압박 들어오자
부실 CP 판매 등 범죄행위도
'환란' 원흉 지목되며 잇단 퇴출
30개 종금사 중 1곳만 살아남아
(13) 1994년 종합금융회사 추가인가
부메랑 된 대형 종금사 육성
사채업 하던 지방 단자사에 외화 조달·여신 등 취급 허용
24곳 무더기 허가로 난립 빌미
고삐 풀린 高위험 투자
국제금융·CP 할인에 혈안, 해외증권 투자 22억弗…8배↑
정부 감독 기능은 작동 안해
대기업 도미노 부도로 공멸
7개 그룹에 빌려준 돈만 6조원…해외서 상환 압박 들어오자
부실 CP 판매 등 범죄행위도
'환란' 원흉 지목되며 잇단 퇴출
30개 종금사 중 1곳만 살아남아
“정부에서 원리금은 다 보장해준다던데….”
“그래도 아파트 중도금 낼 돈은 찾아둬야죠.”
이틀째 내린 눈이 서울 명동거리를 하얗게 뒤덮었던 1998년 1월5일. 이른 아침부터 수백 명의 인파가 종합금융회사들 앞에 몰려들었다. 한 달 전 전국 14개 종금사에 내려진 영업정지가 풀리자 예치금을 찾으러 온 예금주들이었다.
언 발을 구르며 추위를 견디던 이들은 영업점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들이닥쳐 현금을 인출해 갔다. 늦은 대기 순번을 받아 헛걸음한 고객의 아우성에 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날부터 사흘간 이들 종금사에선 약 2만 명의 고객이 1조1000억원을 찾아갔다. 전체 종금사 개인 예금 2조9000억원의 40%에 가까운 규모였다. 한국 금융 역사상 가장 극적인 ‘뱅크런(bank run·대량 예금인출)’ 사태였다.
외환위기 직전까지 은행의 절반에 가까운 자산 규모를 자랑했던 종금사는 이후 영업정지와 폐쇄를 거쳐 차례로 사라져갔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던 금융업태의 멸종을 부른 비극. 그 씨앗은 1993년의 한 금융산업 개편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시대
“단자사(투자금융회사)의 종금사 전환을 허용할 계획입니다.”(1993년 12월 윤증현 재무부 증권정책국장)
김영삼 정부는 출범 첫해인 1993년 ‘지방 단자사의 종금사 전환 방안’을 발표했다. 지방 중소기업에 종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이었다. 나중에 큰 논란을 일으킨 이 방안은 이듬해부터 무려 24곳의 영세 단자사를 종금사로 둔갑시킨다.
종금사는 외화 조달부터 여·수신까지 금융업무 대부분을 취급할 수 있는 ‘금융백화점’이었다. 1973년 오일쇼크 여파로 외환 부족에 시달렸던 박정희 정부는 외자 도입원 확대를 위해 1975년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하고 대기업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 덕분에 1976년 ‘1호’ 한국종금(최대주주 대우그룹)을 시작으로 1979년까지 국제(현대)·새한(산업은행)·한불(한진)·아세아(대한방직)·한외종금(외환은행) 등 이른바 ‘선발 6개사’가 탄생했다.
선발회사들은 영국 등 선진국 금융회사와 자본을 섞어 대외신인도를 개선하고, 기업에 신용대출을 제공하며 성장했다. 어음관리계좌(CMA) 운용과 발행어음(종금사가 발행한 어음) 판매 방식으로 은행처럼 예금도 받았다. 1993년엔 각각 100명 안팎의 인원으로 6개사 합산 1128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다.
반면 단자사의 출생 배경은 종금사와 크게 달랐다. 1972년 ‘8·3 사채동결 조치’로 양성화한 사채업이 뿌리였다. 선발 종금사가 정부의 비호로 화초처럼 성장했다면 단자사들은 부실 채권을 거래하며 자라난 잡초 같았다. 업무 영역도 ‘기업어음(CP) 할인’이 전부였다.
정부는 자본시장 개방에 발맞춰 금융의 경계를 허물고 대형 투자은행(IB)을 육성한다는 취지로 1994년 9곳, 1996년 15곳의 단자사에 종금업 ‘날개’를 달아줬다. 새내기 종금사들은 앞다퉈 국제금융을 맡을 직원의 채용공고를 내며 미래 ‘외환위기 태풍’을 일으키는 날갯짓을 시작했다.
30개 종금사 ‘난립’
“새 종금사들 진짜 겁납니다. 우리는 엄두도 못 냈던 자산에 투자하고….”(선발 종금사 임원)
고위험 투자에 익숙한 ‘미꾸라지’의 대거 출현은 건전한 영업에 집중했던 종금산업의 유전자를 빠르게 바꿔나갔다. 국내외 저리(低利) 자금으로 설비를 구입한 뒤 기업에 빌려주는 리스사업은 쇠퇴하고 국제금융과 고위험 CP 할인 분야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국제금융 업무는 특히 매력적인 분야였다. 한국의 신인도 개선으로 연 6% 수준 이자만 내면 3개월 단위로 달러를 빌려올 수 있었다. 이 자금은 원화 기준 연 10%대 이자를 받고 장기 대출해주거나 고수익 채권 매입에 썼다. 1997년 10월 말 당시 종금사의 외화조달 잔액은 약 200억달러에 가깝게 불어난다. 전체의 60%는 1년 미만의 단기조달이었다.
국제금융에 자신감이 붙은 종금사의 영업은 갈수록 무모해졌다. 일부는 일본 엔화를 단기로 빌려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신흥시장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에 장기로 투자하는 데 전념했다. 1996년 종금사 해외 증권투자는 22억달러로 전년 대비 8배로 급증했다. 외화유동성관리 등에 대한 감독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으로 출범한 재정경제원엔 제2금융권을 감시할 전문 조직이 없었다. 외화 단기차입은 사전 보고나 물량 규제 대상도 아니었다.
단자사 시절부터 해온 CP 할인 대상도 위험 대기업그룹군으로 옮겨갔다. 은행과 제2금융권에 대한 비대칭 규제와 1991년 CP 금리의 자유화는 종금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일으켰다. 1996년 말 종금사 자산 총액은 약 156조원으로 일반은행(342조원)의 절반에 가깝게 팽창했다.
새내기 종금사들은 두 가지 위험만 조심하면 종금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느꼈다. 하나는 대출해준 대기업이 망하는 일, 다른 하나는 사업자금을 단기로 빌려준 쪽에서 만기 연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걱정하기엔 ‘대마불사’의 신화가 건재했다. 후자는 억대 연봉을 주고 채용한 전직 재무부 관료들의 ‘영업력’에 맡겼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위험은 1997년 거짓말처럼 동시에 찾아왔다.
미스매치의 부작용
‘기아그룹 계열 18개사 부도유예 협약 신청(1997년 7월).’
종금산업 전체가 처음 공멸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건은 1997년 여름에 터져나왔다. 재계 8위 기아그룹의 부도유예 발표였다. 연초 한보그룹으로 시작한 대기업그룹의 부도 도미노는 삼미, 진로, 대농에 이어 기아그룹까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대기업 도산을 막아보려 급조한 금융회사들의 ‘부도유예(부도방지) 협약’은 채권회수를 늦추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국내 30개 종금사가 기아그룹에 빌려준 3조9000억원도 일시에 묶여버렸다.
눈치 빠른 해외 금융회사들은 빌려준 달러를 만기 연장 없이 회수하기 시작했다. 종금사들이 1997년 연쇄도산한 7개 대기업그룹에 빌려준 돈은 6조원에 달했다. 기아그룹의 채무상환 실패 당시 이미 종금산업 전체의 자기자본 약 4조원을 넘어선 상태였다.
단기로 빌린 돈을 모두 장기대출과 부실 CP에 쏟아부은 종금사는 외채를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비백산했다. 이때부터 종금사는 파산을 피하려 각종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부실 CP를 우량업체 발행물로 위조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CP를 판매했다. 이렇게 구한 현금은 황급히 달러로 바꿔 발등의 불을 끄는 데 썼다.
종금사들이 서로 달러를 더 비싼 값에 사겠다고 은행에 달려들면서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8월25일 ‘금융시장 안정과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을 발표한다. 이후 한국은행을 통해 15억달러의 피같은 외환보유액과 1조원의 특별융자금을 공급했다. 하지만 모두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해외 금융회사는 한국 은행들의 달러가 부실 종금사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훨씬 높은 보상을 요구하거나 자금 공급을 끊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국가 대외 채무의 10분의 1 수준이었던 종금사 외채의 위기는 금융시스템 전체로 암세포처럼 번져나갔다. 한국의 달러 자금줄은 점점 말라갔고, 어느 순간 완전히 닫혀버렸다. 1997년 11월21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종금사 단 1곳만 생존
재정경제원은 스스로 산파 역할을 맡았던 종금사들을 환란을 키운 원흉으로 지목하고 1998년부터 차례로 단두대에 세웠다.
1998년 2월 10곳(경남, 경일, 고려, 삼삼, 신세계, 쌍용, 청솔, 한화, 항도, 신한종금)을 시작으로 대구, 삼양, 새한, 제일, 한길, 한솔종금까지 한 해 16곳이 문을 닫았다. 1999년엔 한외, 현대, LG종금을 각각 한국외환은행, 강원은행, LG증권에 합병시키고 대한종금은 퇴출됐다.
2000년엔 나라종금을 폐쇄했고, 2001년엔 한국·한스(옛 아세아)·중앙·영남종금을 하나로종금이라는 이름으로 합쳤다. 하나로종금은 2003년 우리은행과 합병해 소멸했다. 동양, 리젠트, 현대울산종금 3개사는 2001년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에 흡수됐다.
선발 6개사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메리츠종금(옛 한불종금)은 2010년 메리츠증권과 하나의 회사로 새출발했다. 2019년 1월 현재 전업 종금사는 1974년 광주투금으로 출발한 우리종금(옛 금호종금)뿐이다. 사라진 29개 전업 종금사 중 경일종금을 뺀 나머지는 모두 상장사였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그래도 아파트 중도금 낼 돈은 찾아둬야죠.”
이틀째 내린 눈이 서울 명동거리를 하얗게 뒤덮었던 1998년 1월5일. 이른 아침부터 수백 명의 인파가 종합금융회사들 앞에 몰려들었다. 한 달 전 전국 14개 종금사에 내려진 영업정지가 풀리자 예치금을 찾으러 온 예금주들이었다.
언 발을 구르며 추위를 견디던 이들은 영업점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들이닥쳐 현금을 인출해 갔다. 늦은 대기 순번을 받아 헛걸음한 고객의 아우성에 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날부터 사흘간 이들 종금사에선 약 2만 명의 고객이 1조1000억원을 찾아갔다. 전체 종금사 개인 예금 2조9000억원의 40%에 가까운 규모였다. 한국 금융 역사상 가장 극적인 ‘뱅크런(bank run·대량 예금인출)’ 사태였다.
외환위기 직전까지 은행의 절반에 가까운 자산 규모를 자랑했던 종금사는 이후 영업정지와 폐쇄를 거쳐 차례로 사라져갔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던 금융업태의 멸종을 부른 비극. 그 씨앗은 1993년의 한 금융산업 개편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시대
“단자사(투자금융회사)의 종금사 전환을 허용할 계획입니다.”(1993년 12월 윤증현 재무부 증권정책국장)
김영삼 정부는 출범 첫해인 1993년 ‘지방 단자사의 종금사 전환 방안’을 발표했다. 지방 중소기업에 종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이었다. 나중에 큰 논란을 일으킨 이 방안은 이듬해부터 무려 24곳의 영세 단자사를 종금사로 둔갑시킨다.
종금사는 외화 조달부터 여·수신까지 금융업무 대부분을 취급할 수 있는 ‘금융백화점’이었다. 1973년 오일쇼크 여파로 외환 부족에 시달렸던 박정희 정부는 외자 도입원 확대를 위해 1975년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하고 대기업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 덕분에 1976년 ‘1호’ 한국종금(최대주주 대우그룹)을 시작으로 1979년까지 국제(현대)·새한(산업은행)·한불(한진)·아세아(대한방직)·한외종금(외환은행) 등 이른바 ‘선발 6개사’가 탄생했다.
선발회사들은 영국 등 선진국 금융회사와 자본을 섞어 대외신인도를 개선하고, 기업에 신용대출을 제공하며 성장했다. 어음관리계좌(CMA) 운용과 발행어음(종금사가 발행한 어음) 판매 방식으로 은행처럼 예금도 받았다. 1993년엔 각각 100명 안팎의 인원으로 6개사 합산 1128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다.
반면 단자사의 출생 배경은 종금사와 크게 달랐다. 1972년 ‘8·3 사채동결 조치’로 양성화한 사채업이 뿌리였다. 선발 종금사가 정부의 비호로 화초처럼 성장했다면 단자사들은 부실 채권을 거래하며 자라난 잡초 같았다. 업무 영역도 ‘기업어음(CP) 할인’이 전부였다.
정부는 자본시장 개방에 발맞춰 금융의 경계를 허물고 대형 투자은행(IB)을 육성한다는 취지로 1994년 9곳, 1996년 15곳의 단자사에 종금업 ‘날개’를 달아줬다. 새내기 종금사들은 앞다퉈 국제금융을 맡을 직원의 채용공고를 내며 미래 ‘외환위기 태풍’을 일으키는 날갯짓을 시작했다.
30개 종금사 ‘난립’
“새 종금사들 진짜 겁납니다. 우리는 엄두도 못 냈던 자산에 투자하고….”(선발 종금사 임원)
고위험 투자에 익숙한 ‘미꾸라지’의 대거 출현은 건전한 영업에 집중했던 종금산업의 유전자를 빠르게 바꿔나갔다. 국내외 저리(低利) 자금으로 설비를 구입한 뒤 기업에 빌려주는 리스사업은 쇠퇴하고 국제금융과 고위험 CP 할인 분야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국제금융 업무는 특히 매력적인 분야였다. 한국의 신인도 개선으로 연 6% 수준 이자만 내면 3개월 단위로 달러를 빌려올 수 있었다. 이 자금은 원화 기준 연 10%대 이자를 받고 장기 대출해주거나 고수익 채권 매입에 썼다. 1997년 10월 말 당시 종금사의 외화조달 잔액은 약 200억달러에 가깝게 불어난다. 전체의 60%는 1년 미만의 단기조달이었다.
국제금융에 자신감이 붙은 종금사의 영업은 갈수록 무모해졌다. 일부는 일본 엔화를 단기로 빌려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신흥시장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에 장기로 투자하는 데 전념했다. 1996년 종금사 해외 증권투자는 22억달러로 전년 대비 8배로 급증했다. 외화유동성관리 등에 대한 감독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으로 출범한 재정경제원엔 제2금융권을 감시할 전문 조직이 없었다. 외화 단기차입은 사전 보고나 물량 규제 대상도 아니었다.
단자사 시절부터 해온 CP 할인 대상도 위험 대기업그룹군으로 옮겨갔다. 은행과 제2금융권에 대한 비대칭 규제와 1991년 CP 금리의 자유화는 종금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일으켰다. 1996년 말 종금사 자산 총액은 약 156조원으로 일반은행(342조원)의 절반에 가깝게 팽창했다.
새내기 종금사들은 두 가지 위험만 조심하면 종금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느꼈다. 하나는 대출해준 대기업이 망하는 일, 다른 하나는 사업자금을 단기로 빌려준 쪽에서 만기 연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걱정하기엔 ‘대마불사’의 신화가 건재했다. 후자는 억대 연봉을 주고 채용한 전직 재무부 관료들의 ‘영업력’에 맡겼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위험은 1997년 거짓말처럼 동시에 찾아왔다.
미스매치의 부작용
‘기아그룹 계열 18개사 부도유예 협약 신청(1997년 7월).’
종금산업 전체가 처음 공멸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건은 1997년 여름에 터져나왔다. 재계 8위 기아그룹의 부도유예 발표였다. 연초 한보그룹으로 시작한 대기업그룹의 부도 도미노는 삼미, 진로, 대농에 이어 기아그룹까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대기업 도산을 막아보려 급조한 금융회사들의 ‘부도유예(부도방지) 협약’은 채권회수를 늦추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국내 30개 종금사가 기아그룹에 빌려준 3조9000억원도 일시에 묶여버렸다.
눈치 빠른 해외 금융회사들은 빌려준 달러를 만기 연장 없이 회수하기 시작했다. 종금사들이 1997년 연쇄도산한 7개 대기업그룹에 빌려준 돈은 6조원에 달했다. 기아그룹의 채무상환 실패 당시 이미 종금산업 전체의 자기자본 약 4조원을 넘어선 상태였다.
단기로 빌린 돈을 모두 장기대출과 부실 CP에 쏟아부은 종금사는 외채를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비백산했다. 이때부터 종금사는 파산을 피하려 각종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부실 CP를 우량업체 발행물로 위조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CP를 판매했다. 이렇게 구한 현금은 황급히 달러로 바꿔 발등의 불을 끄는 데 썼다.
종금사들이 서로 달러를 더 비싼 값에 사겠다고 은행에 달려들면서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8월25일 ‘금융시장 안정과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을 발표한다. 이후 한국은행을 통해 15억달러의 피같은 외환보유액과 1조원의 특별융자금을 공급했다. 하지만 모두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해외 금융회사는 한국 은행들의 달러가 부실 종금사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훨씬 높은 보상을 요구하거나 자금 공급을 끊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국가 대외 채무의 10분의 1 수준이었던 종금사 외채의 위기는 금융시스템 전체로 암세포처럼 번져나갔다. 한국의 달러 자금줄은 점점 말라갔고, 어느 순간 완전히 닫혀버렸다. 1997년 11월21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종금사 단 1곳만 생존
재정경제원은 스스로 산파 역할을 맡았던 종금사들을 환란을 키운 원흉으로 지목하고 1998년부터 차례로 단두대에 세웠다.
1998년 2월 10곳(경남, 경일, 고려, 삼삼, 신세계, 쌍용, 청솔, 한화, 항도, 신한종금)을 시작으로 대구, 삼양, 새한, 제일, 한길, 한솔종금까지 한 해 16곳이 문을 닫았다. 1999년엔 한외, 현대, LG종금을 각각 한국외환은행, 강원은행, LG증권에 합병시키고 대한종금은 퇴출됐다.
2000년엔 나라종금을 폐쇄했고, 2001년엔 한국·한스(옛 아세아)·중앙·영남종금을 하나로종금이라는 이름으로 합쳤다. 하나로종금은 2003년 우리은행과 합병해 소멸했다. 동양, 리젠트, 현대울산종금 3개사는 2001년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에 흡수됐다.
선발 6개사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메리츠종금(옛 한불종금)은 2010년 메리츠증권과 하나의 회사로 새출발했다. 2019년 1월 현재 전업 종금사는 1974년 광주투금으로 출발한 우리종금(옛 금호종금)뿐이다. 사라진 29개 전업 종금사 중 경일종금을 뺀 나머지는 모두 상장사였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