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넷플릭스의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넷플릭스 제공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넷플릭스의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넷플릭스 제공
“이 인터랙티브 필름은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마우스나 터치패드로 하나를 고르면 됩니다.”

영화 시작 전, 이런 메시지가 흐른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스트리밍(OTT) 업체 넷플릭스가 지난달 28일 공개한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얘기다. 넷플릭스는 드라마로 먼저 선보였던 블랙미러 시리즈를 인터랙티브(interactive·쌍방향) 콘텐츠로 제작했다.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선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등 사용자와 콘텐츠가 상호작용하는 작품을 말한다.

선택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된다. 게임 개발을 준비하는 ‘스테판’이란 이름의 소년이 아침에 먹을 시리얼을 고르는 일 등이다. 그러다 한 게임 회사의 제안을 그대로 수락할지와 같은 선택지들이 주어진다. 몰입감 그 이상의 새로운 감정도 느끼게 해준다. 어느 순간 스테판은 외부의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이때부터 사용자는 소년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스토리의 판을 쥐고 흔드는 절대자가 된 기분도 느낀다.

상상력의 한계가 깨지고 있는 걸까. 콘텐츠 ‘다이너미즘(dynamism·역동성)’이 폭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콘텐츠를 이끄는 주체는 더 이상 작품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시공간의 경계도 무너진다. 콘텐츠 트렌드를 가늠하고 전망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순식간에 바뀌기 때문에 내일이면 또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해외 콘텐츠뿐만 아니다. 국내에서도 이전에 없던 콘텐츠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1일 첫 방영된 tvN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기존 드라마의 공식을 무너뜨렸다. 국내외 드라마가 시공간을 오가는 방식은 대부분 비슷했다.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해 갑자기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되는 타임루프(time loop) 정도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증강현실(AR) 게임을 소재로 끌어와 인위적인 타임루프에서 벗어났다. 주인공 진우(현빈 분)의 일상 공간에선 또 다른 게임 세계가 펼쳐진다. 그가 게임에서 죽인 형석(박훈 분)은 현실에서도 죽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또 형석은 일상의 공간에 자꾸만 나타나 진우를 죽이려 한다. 시간을 굳이 조정하지 않고, 화면을 둘로 나누지도 않는다. 한 프레임 안에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동시에 펼쳐놓는다.

역동성이 극대화된 것은 물론 기술의 눈부신 발전 덕분이다. 인터랙티브나 AR 콘텐츠는 첨단기술 없이는 구현할 수 없다. 사용자들이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자연스럽기도 해야 한다. 이젠 그 수준까지 기술이 발전했으며 콘텐츠는 이를 발판으로 무한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다면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다. 다행히 최근 작품들은 대중의 마음을 단번에, 오랫동안 사로잡으며 호평받고 있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어떻게 폭발적으로 확장된 걸까. 역설적이게도 ‘아포리아’ 상태인 현실과 맞닿아 있다. 아포리아는 ‘탈출구가 없는 난관’을 뜻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태다. 이 개념은 잦은 전쟁으로 지쳐가던 고대 그리스에서 생겨났다.

현대인은 사실상 아포리아 상태에 놓여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면서 갈 길을 잃고 있다. ‘이게 실화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이 안에서 개인은 희망보다 절망을, 연대보다 고독을 가깝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아포리아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또 누군가를 위로하고 즐겁게 해줄 생각의 싹을 틔운다.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은 이 강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죽음의 공포 앞에 놓여 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오히려 철학과 예술을 발전시켰듯 말이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