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 60%가 폭행 피해 경험…"목숨 내놓고 진료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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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팀 리포트
폭행·위협 신고 하루 2~3건
정신질환자 칼 품고 들어와도 의료진 피할 길 없어 속수무책
장애등급 안 올려준다며 전문의에게 망치 휘두르기도
간호사·응급구조사는 더 만만
응급실·진료실도 안전공간 아냐
안전한 진료현장 만들려면
비상벨·CCTV 등 인프라 확대
청원경찰 등 병원 배치 늘리고 의료인 폭행 중범죄로 다스려야
폭행·위협 신고 하루 2~3건
정신질환자 칼 품고 들어와도 의료진 피할 길 없어 속수무책
장애등급 안 올려준다며 전문의에게 망치 휘두르기도
간호사·응급구조사는 더 만만
응급실·진료실도 안전공간 아냐
안전한 진료현장 만들려면
비상벨·CCTV 등 인프라 확대
청원경찰 등 병원 배치 늘리고 의료인 폭행 중범죄로 다스려야
4일 오전 7시50분 서울 강북삼성병원 영결식장엔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달 31일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를 앓던 복모씨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은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의 부인은 운구차에 실린 관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고인의 두 아들은 영정사진과 위패를 들었다. 200석 규모의 영결식장은 그를 추모하는 350여 명의 병원 동료들로 가득 찼다. 영결식이 끝난 뒤 유족들은 영정사진을 들고 병원을 한 바퀴 돌았다. 임 교수가 평생 환자를 돌봐온 진료실을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임 교수 피살 사건을 계기로 병원에서 근무하는 전체 의료진에 더 안전한 진료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의사를 포함해 간호사·응급구조사 등 직종을 가리지 않고 폭언·폭행이 끊이지 않아서다. 주취폭력이 자주 발생하는 응급실뿐 아니라 일반 진료실에서까지 살인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의료계는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안전 사각지대에 놓인 병원
임 교수의 소식을 들은 의료계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지방에 있는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교수 A씨는 “환자가 진료실에서 칼을 꺼내 위협했지만 차분하게 설득해 무사히 넘어간 적도 있다”며 “매번 보안요원과 진료실을 같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한숨을 쉬었다.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의료기관 기물 파손 및 의료인 폭행과 협박 등으로 신고·고소된 사건은 893건에 달했다. 지난해 2월 충북 청주의 한 치과에서는 환자 B씨(60)가 “임플란트 시술이 불만”이라며 치과의사를 찾아가 칼로 찔렀다. 같은 해 7월, 강원 강릉에서는 환자 C씨(49)가 장애등급 진단서를 높게 써주지 않았다며 전문의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는 사건이 있었다.
의료진 폭력사태가 반복적으로 일어나자 국회는 지난해 응급실 의료종사자에 폭행이 가해지는 경우 가중 처벌하는 내용의 ‘응급의료에 관한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응급실을 제외한 병원 나머지 공간은 여전히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일반 진료현장의 폭행 방지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 안전인력 배치, 반의사불벌죄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임세원법’ 제정이 시급한 이유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격앙된 상태로 일반 진료실을 찾는 환자가 많아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정신과 등을 제외하면 일반 진료실은 비상벨, 대피통로 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더 위험한 병원 인턴·간호사·응급구조사
인턴, 간호사, 응급구조사 등은 병원 내 폭행·폭언에 더욱 취약하다는 평가다. 환자·보호자와 대면하는 시간이 길고 의사에 비해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편견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방의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는 이모씨(28)는 “전공의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간호사나 레지던트에게 화풀이로 쏟아내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털어놨다.
이형민 고려대 구로병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의사·간호사·응급구조사 177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들이 느끼는 안전성은 간호사와 응급구조사가 의사에 비해 낮게 나타났다. 이 교수는 “간호사가 느끼는 공포가 가장 컸고 이어 응급구조사, 전공의·전문의 순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응급실에서 폭언을 당했다고 답한 사람은 96%, 폭행을 경험했다는 사람도 62%에 달했다. 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의료진 역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진료 행위 자체에 대한 공포가 커져 결국 고스란히 환자의 손해로 이어진다. 한 간호사는 “얼마 전 응급실에서 환자에게 뺨을 맞고 경찰에 신고했더니 합의하라는 얘기만 들었다”며 “성추행하는 주취 환자를 세 번이나 신고했지만 세 번 다 경찰이 와선 환자 치료하라며 그냥 가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 배치도 늘려야
전문가들은 비상벨·폐쇄회로TV(CCTV) 설치, 안전인력 배치 등 인프라를 확충하고 의료진 폭행을 중범죄로 여기는 인식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1차적으로 안전인력 확보가 필수적”이라면서도 “안전인력 비용을 병원에서 부담하는 상황에선 자발적으로 인원을 확충하는 게 사실상 어렵다”고 지적했다.
경찰 및 청원경찰을 병원에 확대 배치하는 방안도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주취자 보호·관리를 위해 공공병원 등에 설치된 ‘주취자 응급의료센터’에는 총 56명의 경찰이 근무하고 있다. 전국 의료기관 15곳에 청원경찰 58명도 배치됐다. 2년간 주취자 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한 한 경찰관은 “사설 경비업체에 소속된 보안요원에 비해 경찰 및 청원경찰이 상주하는 것만으로도 범죄 예방 효과가 크다”며 “응급실은 물론 중환자실과 일반 진료실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1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총기 사고가 많은 미국은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금속탐지기 등 적절한 보안수단을 설치·유지할 것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기동훈 경기도의료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미국·일본 병원에선 정신과 등 일부 과의 경우 금속탐지기를 통과하고 병동에 들어가게 한다”고 설명했다.
의료진 폭행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기동훈 전문의는 “의료인들에 대한 폭행·협박은 다른 환자들의 진료 지연으로 이어져 일반 폭행과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며 “의료진에 가해지는 폭력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법률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선진국들은 의료진에 대한 폭력행위를 중범죄로 간주한다. 미국 앨라배마주는 병원에 고용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경우 2급 폭행죄로 분류해 최고 징역 7년형까지 선고한다. 진료실·장기요양시설·지역 보건기관 등 폭행이 발생할 수 있는 장소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호주도 의사 및 간호사, 구급대원을 폭행하면 최고 14년형을 받을 수 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
임 교수 피살 사건을 계기로 병원에서 근무하는 전체 의료진에 더 안전한 진료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의사를 포함해 간호사·응급구조사 등 직종을 가리지 않고 폭언·폭행이 끊이지 않아서다. 주취폭력이 자주 발생하는 응급실뿐 아니라 일반 진료실에서까지 살인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의료계는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안전 사각지대에 놓인 병원
임 교수의 소식을 들은 의료계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지방에 있는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교수 A씨는 “환자가 진료실에서 칼을 꺼내 위협했지만 차분하게 설득해 무사히 넘어간 적도 있다”며 “매번 보안요원과 진료실을 같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한숨을 쉬었다.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의료기관 기물 파손 및 의료인 폭행과 협박 등으로 신고·고소된 사건은 893건에 달했다. 지난해 2월 충북 청주의 한 치과에서는 환자 B씨(60)가 “임플란트 시술이 불만”이라며 치과의사를 찾아가 칼로 찔렀다. 같은 해 7월, 강원 강릉에서는 환자 C씨(49)가 장애등급 진단서를 높게 써주지 않았다며 전문의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는 사건이 있었다.
의료진 폭력사태가 반복적으로 일어나자 국회는 지난해 응급실 의료종사자에 폭행이 가해지는 경우 가중 처벌하는 내용의 ‘응급의료에 관한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응급실을 제외한 병원 나머지 공간은 여전히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일반 진료현장의 폭행 방지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 안전인력 배치, 반의사불벌죄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임세원법’ 제정이 시급한 이유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격앙된 상태로 일반 진료실을 찾는 환자가 많아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정신과 등을 제외하면 일반 진료실은 비상벨, 대피통로 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더 위험한 병원 인턴·간호사·응급구조사
인턴, 간호사, 응급구조사 등은 병원 내 폭행·폭언에 더욱 취약하다는 평가다. 환자·보호자와 대면하는 시간이 길고 의사에 비해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편견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방의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는 이모씨(28)는 “전공의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간호사나 레지던트에게 화풀이로 쏟아내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털어놨다.
이형민 고려대 구로병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의사·간호사·응급구조사 177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들이 느끼는 안전성은 간호사와 응급구조사가 의사에 비해 낮게 나타났다. 이 교수는 “간호사가 느끼는 공포가 가장 컸고 이어 응급구조사, 전공의·전문의 순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응급실에서 폭언을 당했다고 답한 사람은 96%, 폭행을 경험했다는 사람도 62%에 달했다. 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의료진 역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진료 행위 자체에 대한 공포가 커져 결국 고스란히 환자의 손해로 이어진다. 한 간호사는 “얼마 전 응급실에서 환자에게 뺨을 맞고 경찰에 신고했더니 합의하라는 얘기만 들었다”며 “성추행하는 주취 환자를 세 번이나 신고했지만 세 번 다 경찰이 와선 환자 치료하라며 그냥 가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 배치도 늘려야
전문가들은 비상벨·폐쇄회로TV(CCTV) 설치, 안전인력 배치 등 인프라를 확충하고 의료진 폭행을 중범죄로 여기는 인식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1차적으로 안전인력 확보가 필수적”이라면서도 “안전인력 비용을 병원에서 부담하는 상황에선 자발적으로 인원을 확충하는 게 사실상 어렵다”고 지적했다.
경찰 및 청원경찰을 병원에 확대 배치하는 방안도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주취자 보호·관리를 위해 공공병원 등에 설치된 ‘주취자 응급의료센터’에는 총 56명의 경찰이 근무하고 있다. 전국 의료기관 15곳에 청원경찰 58명도 배치됐다. 2년간 주취자 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한 한 경찰관은 “사설 경비업체에 소속된 보안요원에 비해 경찰 및 청원경찰이 상주하는 것만으로도 범죄 예방 효과가 크다”며 “응급실은 물론 중환자실과 일반 진료실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1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총기 사고가 많은 미국은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금속탐지기 등 적절한 보안수단을 설치·유지할 것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기동훈 경기도의료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미국·일본 병원에선 정신과 등 일부 과의 경우 금속탐지기를 통과하고 병동에 들어가게 한다”고 설명했다.
의료진 폭행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기동훈 전문의는 “의료인들에 대한 폭행·협박은 다른 환자들의 진료 지연으로 이어져 일반 폭행과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며 “의료진에 가해지는 폭력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법률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선진국들은 의료진에 대한 폭력행위를 중범죄로 간주한다. 미국 앨라배마주는 병원에 고용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경우 2급 폭행죄로 분류해 최고 징역 7년형까지 선고한다. 진료실·장기요양시설·지역 보건기관 등 폭행이 발생할 수 있는 장소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호주도 의사 및 간호사, 구급대원을 폭행하면 최고 14년형을 받을 수 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