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과 의형제가 벌인 모험담…"권력의 잔인한 민낯 들춰냈죠"
우리가 다 아는 역사적 인물의 삶과 선택을 바꾼 숨은 인물이 있었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역사가 크고 작게 바뀌게 됐다면 어땠을까. 소설가 성석제(사진)가 《투명인간》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문학동네)는 이 같은 가정에서 출발한다. 조선 숙종 시대를 살았던 ‘성형’이란 인물 이야기다.

성 작가가 작품을 쓴 계기는 매우 흥미롭다. 서울 노량진역 중고책방을 뒤지다 우연히 찾은 열두 권짜리 《국역 연려실기술》을 구입하면서다. 전집을 펼쳐보던 그는 책과 맞먹는 두께의 복사본 책을 발견했다. 여러 사람 손에 의해 낯선 한자와 떡진 언어들로 버무려진 ‘소설’이었지만 무시하기엔 그 가치관이 뚜렷했다. 성 작가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각종 사료를 참고하고 자기 이야기를 덧붙여 이 작품을 완성했다.

소설은 우암 송시열 집 앞에서 곤경에 처한 성형을 열 살배기 왕자(숙종)가 구해주면서 시작된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삼국지연의 유비·관우·장비처럼 한날한시 죽는다는 형제의 연을 맺는다. 4년 뒤 열네 살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형제가 없던 숙종은 시정잡배였던 그를 형이라 부르며 대전별감으로 곁에 둔다. 그는 서인과 남인이 권력싸움을 벌이고 희빈 장씨 등장과 인현왕후 복위 등 왕실 내 권력투쟁도 심했던 20여 년간의 격랑을 숨은 형으로 숙종을 그림자처럼 지킨다.

소설은 당시 조선시대 풍습과 제도, 관행 등을 충실히 담아내며 역사소설의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한편으론 무협소설처럼 인물과 인물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 속에서 슬슬 읽어내려가는 재미를 준다. 성형이 시정잡배 출신답게 지체 높은 대감들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모습에서 통쾌함도 느껴진다. 세종이나 성종 같은 성군이 되지 못한 왕을 훈계하는 성형에게 “내가 그 피가 아닌가봐”라고 농담을 던지는 숙종은 읽는 이를 웃음짓게 만든다. 소설 속 성형은 숙종과 의형제 관계를 넘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을 형님으로 모시거나, 훗날 희빈 장씨가 되는 장옥정을 연모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왕과 의형제가 벌이는 모험담을 담은 이 소설은 ‘말 한마디와 글 한 줄이 가진 위력’ ‘권력의 잔인한 맨 얼굴’ 등 권력이 가진 본질에 대해 신랄하게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성형’과 같이 역사 속에서 흔적을 찾아볼 순 없지만 그 흐름을 바꿨던 수많은 익명의 존재가 있었기에 그들의 유전자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것이란 깨달음을 던진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