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의장, PC통신서 온라인게임…메신저 넘어 카풀·인터넷은행으로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닙니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52)이 2007년 NHN(현 네이버)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남긴 메시지다. ‘항구(성공)’에 머물지 않고 ‘바다(신사업 도전)’로 매번 떠나는 ‘배(기업가)’, 그 자신을 일컫은 비유였다.

김 의장의 도전은 서울대 대학원(산업공학 전공) 재학 시절에 시작됐다. 후배 하숙집에서 PC통신을 처음 접한 뒤 발동이 걸렸다. 3개월간 PC통신의 매력에 빠져 살았다. 대학원 논문 주제를 PC통신으로 바꿨을 정도다. 그는 PC통신을 통해 온라인 세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봤다.

첫 직장도 컴퓨터를 원없이 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국내 최대 정보기술(IT) 서비스업체 삼성SDS를 택한 배경이었다. 그는 PC통신 서비스 ‘유니텔’ 개발팀에 합류했다. 명령어를 타이핑해 PC통신 하던 방식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마우스 클릭 방식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 최대 PC방 차려 자금 모아

PC통신에서 성취를 이루고 나니 더 넓은 온라인 세상이 다가왔다. ‘온라인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재밌게 즐기는 놀이동산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그는 마이너스통장으로 마련한 500만원을 쥐고 1997년 창업했다. 온라인 게임 개발이 사업 아이템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터졌고 돈줄이 말랐다. 게임 개발보다는 자금 마련이 급선무였다. 선택지는 PC방이었다.

“PC방을 하려면 근처 상권을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해야 해. 그래야 게임사업 자금을 빠른 시일 내 확보할 수 있을 거야.” 서울 한양대 앞에 국내 최대 PC방을 차렸고, 승부수는 통했다.

자금 압박에서 벗어나자 1998년 게임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PC방 운영으로 확보한 자금 5000만원으로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1999년 한게임은 고스톱, 테트리스, 바둑 등 온라인 게임을 유통했다. 서비스 개시 3개월 만에 회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회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게임은 무료라서 돈은 제대로 벌지 못했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때 삼성SDS의 옛 동료가 연락을 해왔다. 인터넷 검색 서비스업체 네이버컴(현 네이버)의 이해진 대표와 김정호 이사였다. 당시 네이버컴은 기술력은 있었지만 사용자 증가 속도가 더뎠다. 이용자가 급증하고 있는 한게임이 메울 수 있는 부분이었다.

2000년 4월 한게임과 네이버컴은 합병을 공식화했다. 네이버컴과 한게임의 합병비율은 4 대 1이었다. 인수 주체도 네이버컴이었다. 이해진·김범수 공동대표 체제로 시작했지만 김 의장이 손해봤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

일부 한게임 직원은 불만을 토로했다. 김 의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회사의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만 생각했다. 한국 인터넷산업을 주도하는 회사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1년도 되지 않아 위기가 찾아왔다. 한게임 이용자가 꾸준히 늘면서 네이버컴의 서버와 인력으로 버틸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사용자 이탈을 우려했지만 대안은 유료화밖에 없었다. 게임은 무료를 유지하되 유료 기능을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높여주는 아이템 판매였다. 2001년 3월 유료 서비스를 도입했다. 서비스 첫날 1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그해 9월 회사명을 NHN으로 변경했다.

김 의장의 새로운 ‘배’ NHN은 순항했다. 2002년 상장했고, 2007년 매출이 9202억원으로 불어났다. 그는 NHN의 일본, 중국, 미국 시장 진출을 주도했다. 예상한 만큼 성과가 크지는 않았다.

모바일 시대의 핵심은 커뮤니케이션

회사 덩치가 커지자 한계를 직감한 것일까. 2007년 9월 김 의장은 NHN을 떠났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혁명’에서 모바일 시대 도래를 예상했다. 새 회사 아이위랩(현 카카오)을 세웠다. 콘텐츠 수집과 정리, 공유 기능을 강화한 블로그 서비스 ‘부루닷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위지아닷컴’ 등을 내놨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좌절할 순 없었다. 그래도 “모바일 시대의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판단했다.” 아이위랩은 2010년 3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출시했다. 해외에서는 와츠앱, 한국에서는 엠앤톡이 먼저 시장에 나왔다.

카카오톡은 본질에 충실하기로 했다. 더욱 안정적인 서비스에 집중했다. 스마트폰 기기에 맞게 사용자환경(UI)을 단순화했다. 카카오톡은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필수 앱(응용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국민 메신저’로 급부상했다.

카카오톡의 다운로드 수는 출시 1년 만에 1000만 건을 돌파했다. 4개월 뒤엔 두 배인 2000만 건을 넘겼다. 회사명을 아이위랩에서 카카오로 바꿨다. 하지만 여전히 적자였다. 영업손실 규모가 2009년 17억원에서 2011년 152억원까지 커졌다. 무료 카카오톡 이용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한게임 유료화를 앞둔 상황과 비슷했다.

당시와 달리 김 의장은 카카오톡 유료화를 서두르지 않았다. 이용자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돈 가치가 있는 상품’ 위주로 유료 서비스를 하나둘 도입했다. 기업용 광고 플랫폼 ‘플러스 친구’, 전자상거래 서비스 ‘선물하기’, 유료 이모티콘 판매 등을 내놨다. 이것만으로는 서버 운영·보수, 신규 서비스 개발 비용 등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김 의장은 때를 더 기다렸다. 카카오는 이후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모바일 게임 유통에 힘썼다. 2012년 7월 ‘카카오톡 게임하기’ 서비스를 출시했다. ‘애니팡’ ‘드래곤플라이트’ 등 카카오톡 게임들이 ‘대박’을 쳤다. 게임에서 발생하는 매출의 20%를 카카오가 수수료로 챙겼다. 카카오는 2012년 설립 6년 만에 첫 흑자를 기록한 뒤 수익을 꾸준히 내고 있다.

그런데도 김 의장은 항구에 머무를 수 없었다. 2014년 10월 김 의장은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포털업체 다음과 합병하고 자신이 세우고 키운 네이버와 경쟁하고 있다. 항구 안의 배처럼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신사업을 찾아 바다로 나섰다.

그는 “한국에서는 한 번 실패하면 끝장나기 때문에 창업하면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머물지 않고 현재의 환경에 변화를 주는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김범수 의장은

△1966년 서울 출생
△1990년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1992년 삼성SDS 입사
△1998년 한게임커뮤니케이션 설립
△2000년 네이버컴 공동대표
△2004년 NHN 대표
△2007년 아이위랩(카카오의 전신) 대표
△2011년 카카오 이사회 의장
△2016년 제1대 스타트업 캠퍼스 총장
△2017년 카카오브레인 대표
△2018년 카카오임팩트 이사장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