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벼랑으로 치닫고 있다.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해산, 그리고 ‘레이더 사건’과 신닛테쓰스미킨 국내 재산 압류로 이어지면서 갈수록 악화되는 양상이다. 불편한 양국 관계는 국방백서에까지 반영됐다. 엊그제 나온 ‘2018년 국방백서’는 한·일 관계와 관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기본가치 공유’라는 기존 표현을 없앴다. 또 주변국과의 군사교류협력 순서도 과거 한·일, 한·중, 한·러 순이었던 것을 한·중, 한·일, 한·러 순으로 바꿨다.

일본도 강 대 강으로 맞서는 형국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며 구체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아베는 지난달 열린 한일의원연맹 합동총회에 축사도 보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양국 간 갈등이 급기야 경제 문제에까지 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판결이 나온 지 1주일 만에 한국 정부의 조선산업 지원이 부당하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이어 최근에는 한국 정부에 과거 10년치 상세 지원 내역을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조선업계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이 공정한 국제 경쟁을 방해해 일본 기업에 피해를 줬다는 주장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일본이 올해 세계 1위를 탈환한 한국 조선산업을 견제하는 것과 동시에 강제징용 배상이나 레이더 사건 등과 관련해 한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통상 문제를 들고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모처럼 회생 기회를 잡은 조선업계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자칫 정부의 조선회사 지원이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일본에 상계관세를 물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 소재, 부품, 장비 면에서는 아직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1997년 11월 초, 일본은 한국에서 100억달러의 자금을 회수해갔다. 당시 외채(1200억달러)를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한국은 얼마 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외교에서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여기에만 집착하다간 더 큰 실리를 잃을 수도 있다. 한·일 관계 불협화음이 더 큰 경제 부메랑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