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끼리 '송전선 갈등' 그 뒤엔 규제…핑퐁式 싸움에 멈춘 반도체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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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선로 건립 5년째 표류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1년 갈등 조정에도 결국 원점으로
안성 주민들, 상수원구역 해제·선로 변경 등 대안 내놨지만
평택 등 해당지역 주민들 반발…물류단지는 지자체에 또 막혀
삼성 평택 반도체 공장 차질 우려…일자리 44만개 날아갈 판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1년 갈등 조정에도 결국 원점으로
안성 주민들, 상수원구역 해제·선로 변경 등 대안 내놨지만
평택 등 해당지역 주민들 반발…물류단지는 지자체에 또 막혀
삼성 평택 반도체 공장 차질 우려…일자리 44만개 날아갈 판
“삼성전자가 30조원짜리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평택만 혜택을 보는데 흉물스러운 송전탑은 왜 우리 지역에 설치해야 합니까.”
지난해 11월 초 경기 안성시 원곡면사무소 2층 대회의실.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립을 둘러싼 갈등조정위원회 회의에서 원곡면 주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은 “국익도 중요하지만 주민 건강을 위협하고 환경을 훼손하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송전선을 땅에 묻지 않는 한 원곡면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한국전력 직원들이 ‘송·변전 설비 주변 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직접 보상은 물론 마을 정비, 장학기금 조성 등 간접 보상까지 약속했지만 소용없었다. 28차례에 걸친 갈등조정회의는 이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번번이 가로막힌 중재안
전자업계는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립을 둘러싼 갈등 중재 과정은 지역 이기주의와 규제의 ‘합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원곡면 주민들과 한전이 한발씩 양보해 새로운 해법을 찾으면 다른 지역이 반발하고, 반발을 잠재우면 생각지도 못한 규제에 가로막혔다.
송탄상수원보호구역 해제 요구가 그랬다. 1979년 평택 주민들의 식수권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송탄취수장 주변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평택시와 안성시의 뿌리 깊은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평택시는 고덕산업단지가 생기는 등 자유로운 개발이 이뤄진 반면 안성시는 개발 사업이 엄격하게 금지됐다. 원곡면 주민들은 지난해 1월 “평택시를 위한 송전탑이 안성에 건립돼야 한다면 그 대가로 송탄상수원보호구역을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평택호 수질이 나빠질 수 있다”는 평택 주민의 반발에 막혀 무산됐다.
4개월 뒤 갈등조정위원회가 어렵게 마련한 대안을 거꾸러뜨린 것도 상수원보호구역 규제였다. 한전과 원곡면 주민들은 안성시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삼성전자 협력사를 유치하자고 제안했다. 삼성전자와 협력업체들은 흔쾌히 동의했지만 ‘상수원보호구역엔 산업단지를 조성할 수 없다’는 법 규정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곡면 주민들이 물류단지 조성안을 들고나온 건 지난해 8월이었다. 물류단지를 건립하면서 송전선로 지중화 공사를 함께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산간 지역에 조성하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안성시의 반대에 막혔다.
갈등조정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원곡면을 지나가는 13개 송전탑 중 마을 인근을 통과하는 송전탑은 땅에 묻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산간 지역 4㎞ 구간에는 송전탑을 짓자고 제시한 것. 한전은 수용 의사를 밝혔지만 주민들은 거부했다.
속타는 삼성전자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립이 표류하자 삼성전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지금 송전탑 건립 공사에 들어가도 2023년에나 전력 공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택 반도체 2공장이 2020년께 가동하는 만큼 자칫 전력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삼성전자는 우려하고 있다. 2공장의 최종 투자 규모는 약 30조원이다. 직·간접적인 고용 창출효과는 44만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송전탑 갈등’으로 투자와 고용 모두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24시간 가동하는 반도체 공장은 전력 공급이 잠깐이라도 중단되면 웨이퍼를 전량 폐기해야 하는 등 수백억원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며 “현재 고덕산업단지 전력 공급량은 600㎿에 불과해 2공장이 본격 운영되면 전력난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은 향후 증설을 고려해 반도체 라인 4개를 깔 수 있는 규모로 설계됐다. 한전은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설을 통해 고덕산업단지에 총 2000㎿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송전선로가 건설돼야 3공장, 4공장도 추가로 지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전 직원들이 현장사무소까지 차리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한전은 2021년 6월까지 송전선로 건설을 완료하기로 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2023년 2월로 완공 시점을 미뤘다.
“삼성과 한전이 비용을 대고 3차선 도로를 건설한 뒤 산간지역까지 지중화 작업을 하라”는 주민의 요구를 수용하면 1200억원의 추가 비용과 함께 공사 기간은 6년으로 늘어난다. “마을 주민들이 삼성의 다급함을 무기로 버티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지난해 11월 초 경기 안성시 원곡면사무소 2층 대회의실.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립을 둘러싼 갈등조정위원회 회의에서 원곡면 주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은 “국익도 중요하지만 주민 건강을 위협하고 환경을 훼손하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송전선을 땅에 묻지 않는 한 원곡면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한국전력 직원들이 ‘송·변전 설비 주변 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직접 보상은 물론 마을 정비, 장학기금 조성 등 간접 보상까지 약속했지만 소용없었다. 28차례에 걸친 갈등조정회의는 이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번번이 가로막힌 중재안
전자업계는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립을 둘러싼 갈등 중재 과정은 지역 이기주의와 규제의 ‘합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원곡면 주민들과 한전이 한발씩 양보해 새로운 해법을 찾으면 다른 지역이 반발하고, 반발을 잠재우면 생각지도 못한 규제에 가로막혔다.
송탄상수원보호구역 해제 요구가 그랬다. 1979년 평택 주민들의 식수권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송탄취수장 주변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평택시와 안성시의 뿌리 깊은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평택시는 고덕산업단지가 생기는 등 자유로운 개발이 이뤄진 반면 안성시는 개발 사업이 엄격하게 금지됐다. 원곡면 주민들은 지난해 1월 “평택시를 위한 송전탑이 안성에 건립돼야 한다면 그 대가로 송탄상수원보호구역을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평택호 수질이 나빠질 수 있다”는 평택 주민의 반발에 막혀 무산됐다.
4개월 뒤 갈등조정위원회가 어렵게 마련한 대안을 거꾸러뜨린 것도 상수원보호구역 규제였다. 한전과 원곡면 주민들은 안성시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삼성전자 협력사를 유치하자고 제안했다. 삼성전자와 협력업체들은 흔쾌히 동의했지만 ‘상수원보호구역엔 산업단지를 조성할 수 없다’는 법 규정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곡면 주민들이 물류단지 조성안을 들고나온 건 지난해 8월이었다. 물류단지를 건립하면서 송전선로 지중화 공사를 함께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산간 지역에 조성하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안성시의 반대에 막혔다.
갈등조정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원곡면을 지나가는 13개 송전탑 중 마을 인근을 통과하는 송전탑은 땅에 묻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산간 지역 4㎞ 구간에는 송전탑을 짓자고 제시한 것. 한전은 수용 의사를 밝혔지만 주민들은 거부했다.
속타는 삼성전자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립이 표류하자 삼성전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지금 송전탑 건립 공사에 들어가도 2023년에나 전력 공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택 반도체 2공장이 2020년께 가동하는 만큼 자칫 전력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삼성전자는 우려하고 있다. 2공장의 최종 투자 규모는 약 30조원이다. 직·간접적인 고용 창출효과는 44만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송전탑 갈등’으로 투자와 고용 모두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24시간 가동하는 반도체 공장은 전력 공급이 잠깐이라도 중단되면 웨이퍼를 전량 폐기해야 하는 등 수백억원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며 “현재 고덕산업단지 전력 공급량은 600㎿에 불과해 2공장이 본격 운영되면 전력난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은 향후 증설을 고려해 반도체 라인 4개를 깔 수 있는 규모로 설계됐다. 한전은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설을 통해 고덕산업단지에 총 2000㎿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송전선로가 건설돼야 3공장, 4공장도 추가로 지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전 직원들이 현장사무소까지 차리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한전은 2021년 6월까지 송전선로 건설을 완료하기로 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2023년 2월로 완공 시점을 미뤘다.
“삼성과 한전이 비용을 대고 3차선 도로를 건설한 뒤 산간지역까지 지중화 작업을 하라”는 주민의 요구를 수용하면 1200억원의 추가 비용과 함께 공사 기간은 6년으로 늘어난다. “마을 주민들이 삼성의 다급함을 무기로 버티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