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입력장치가 고장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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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양반의 경직성, 21세기 재연
신념 투철할수록 현실 오독·왜곡
80년대 넘어 '긍정의 가치' 세워야"
오형규 논설위원
신념 투철할수록 현실 오독·왜곡
80년대 넘어 '긍정의 가치' 세워야"
오형규 논설위원
늙음은 ‘입력장치는 고장 나고 출력장치만 작동하는 상태’라는 사회학자 이진경의 정의는 설득력 있다. 공부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기만 할 때 그게 늙은 것이다.
‘입력’의 중요성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하등 다를 게 없다. 조선의 512년 굴곡진 역사에서 지배층 양반의 폐쇄성과 경직된 당파성이 민초들을 얼마나 참담하게 만들었나. 조선통신사의 정반대 보고, 왜란에 호란까지 초래한 둔감함, 백성을 위한 경쟁이 아닌 당쟁 몰입, 세상 변화와 거꾸로 간 쇄국과 망국….
5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신념과 관습이 한국인의 집단DNA에 또렷이 각인돼 있지 않을 리 없다. 지금도 사농공상, 관존민비는 면면히 이어진다. 정규·비정규직 차별에선 적서(嫡庶) 차별을 연상케 된다. 결혼시장에서 부모 직업, 사는 동네가 판단기준이고, 약간만 우월적 지위여도 갑질이 만연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과잉, 도덕과잉에다 타인에게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내로남불’도 그 뿌리가 동일하다.
유감스럽게도 조선 양반의 경직성을 현 집권세력을 구성하는 운동권 범(汎)좌파에서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586 운동권을 도덕 근본주의로 치달은 조광조의 사림파에 비유하거나(조윤민 《두 얼굴의 조선사》), 구한말 위정척사파에서 좌파의 뿌리를 찾기도 한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그만큼 신념윤리가 투철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개화기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관찰에 따르면 “예(禮)만 제대로 지키면 십계명을 다 어겨도 여전히 훌륭한 사람으로 남는 존재”가 양반이었다.
강한 신념은 입력장치의 정상 작동을 가로막는다. 그럴수록 확증편향이 강해져 문제 해결능력과 책임윤리가 희박해진다. 현실을 관념으로 인식하고, 정당한 비판이나 대안까지도 프레임으로 걸러 보는 탓이다. 이는 지행(知行)불일치의 이중성으로 구현된다. 양반은 겉으로 안빈낙도를 찬양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재력가이자 착취자였던 게 실제 역사다. 퇴계조차 367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정부의 입력장치 고장 징후가 확연해진다. 산업벨트와 자영업의 몰락에도 소득주도 성장은 불변이고, 절박한 호소를 ‘경제 실패 프레임’으로 치부하는 데서 ‘출력’만 왕성한 ‘의식의 노화’가 엿보인다. 그런 경직성은 급기야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다”고 단언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장하성의 그림자’가 청와대에 짙게 드리운 모양이다.
‘나만 옳다’는 우월의식과 ‘내로남불’의 이중잣대는 종종 궤변으로 불거져 나온다. 특권교육을 철폐하겠다면서 자식은 외고에 보낸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용기가 없어 아들을 주류로 키웠다”고 변명했다. 양반계급의 상업과 이윤에 대한 적대감이 지금은 반(反)시장·반기업으로 표출된다. 경제학 박사라는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대기업만 잘 되고 맛집만 가는 악순환을 깨겠다”는 취지의 발언에서 소비자 선택까지 좌우하겠다는 ‘치명적 자만’이 읽힌다.
한국은 이제 세계 11위권 경제규모, 230여 개국에 상품을 파는 6위 수출국, 국민소득 3만달러인 나라다. 그런 만큼 문제인식과 해결 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 텐데, 1980년대식 문제의식에 갇혀 있다. 아직도 한국 사회를 ‘식민지, 독점·매판자본, 반(半)봉건’ 상태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후대에 물려줄 ‘긍정의 가치’가 무엇이 있나.
경제의 불씨를 살리려면 정권의 입력장치부터 손봐야 한다. 얼굴의 주름은 보톡스, 필러로 감춘다 해도 정신의 주름은 감추기 어렵다. 아직도 양반적 우월의식에 갇혀 있다면 평론가 신형철의 사려 깊은 문장을 권한다. “타인은 단순히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다.”
ohk@hankyung.com
‘입력’의 중요성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하등 다를 게 없다. 조선의 512년 굴곡진 역사에서 지배층 양반의 폐쇄성과 경직된 당파성이 민초들을 얼마나 참담하게 만들었나. 조선통신사의 정반대 보고, 왜란에 호란까지 초래한 둔감함, 백성을 위한 경쟁이 아닌 당쟁 몰입, 세상 변화와 거꾸로 간 쇄국과 망국….
5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신념과 관습이 한국인의 집단DNA에 또렷이 각인돼 있지 않을 리 없다. 지금도 사농공상, 관존민비는 면면히 이어진다. 정규·비정규직 차별에선 적서(嫡庶) 차별을 연상케 된다. 결혼시장에서 부모 직업, 사는 동네가 판단기준이고, 약간만 우월적 지위여도 갑질이 만연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과잉, 도덕과잉에다 타인에게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내로남불’도 그 뿌리가 동일하다.
유감스럽게도 조선 양반의 경직성을 현 집권세력을 구성하는 운동권 범(汎)좌파에서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586 운동권을 도덕 근본주의로 치달은 조광조의 사림파에 비유하거나(조윤민 《두 얼굴의 조선사》), 구한말 위정척사파에서 좌파의 뿌리를 찾기도 한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그만큼 신념윤리가 투철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개화기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관찰에 따르면 “예(禮)만 제대로 지키면 십계명을 다 어겨도 여전히 훌륭한 사람으로 남는 존재”가 양반이었다.
강한 신념은 입력장치의 정상 작동을 가로막는다. 그럴수록 확증편향이 강해져 문제 해결능력과 책임윤리가 희박해진다. 현실을 관념으로 인식하고, 정당한 비판이나 대안까지도 프레임으로 걸러 보는 탓이다. 이는 지행(知行)불일치의 이중성으로 구현된다. 양반은 겉으로 안빈낙도를 찬양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재력가이자 착취자였던 게 실제 역사다. 퇴계조차 367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정부의 입력장치 고장 징후가 확연해진다. 산업벨트와 자영업의 몰락에도 소득주도 성장은 불변이고, 절박한 호소를 ‘경제 실패 프레임’으로 치부하는 데서 ‘출력’만 왕성한 ‘의식의 노화’가 엿보인다. 그런 경직성은 급기야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다”고 단언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장하성의 그림자’가 청와대에 짙게 드리운 모양이다.
‘나만 옳다’는 우월의식과 ‘내로남불’의 이중잣대는 종종 궤변으로 불거져 나온다. 특권교육을 철폐하겠다면서 자식은 외고에 보낸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용기가 없어 아들을 주류로 키웠다”고 변명했다. 양반계급의 상업과 이윤에 대한 적대감이 지금은 반(反)시장·반기업으로 표출된다. 경제학 박사라는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대기업만 잘 되고 맛집만 가는 악순환을 깨겠다”는 취지의 발언에서 소비자 선택까지 좌우하겠다는 ‘치명적 자만’이 읽힌다.
한국은 이제 세계 11위권 경제규모, 230여 개국에 상품을 파는 6위 수출국, 국민소득 3만달러인 나라다. 그런 만큼 문제인식과 해결 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 텐데, 1980년대식 문제의식에 갇혀 있다. 아직도 한국 사회를 ‘식민지, 독점·매판자본, 반(半)봉건’ 상태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후대에 물려줄 ‘긍정의 가치’가 무엇이 있나.
경제의 불씨를 살리려면 정권의 입력장치부터 손봐야 한다. 얼굴의 주름은 보톡스, 필러로 감춘다 해도 정신의 주름은 감추기 어렵다. 아직도 양반적 우월의식에 갇혀 있다면 평론가 신형철의 사려 깊은 문장을 권한다. “타인은 단순히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다.”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