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배당과 임원 선임 등 경영권 개입을 선언한 데 이어 경영진을 상대로 직접 손해배상 책임까지 묻기로 하면서 기업들이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수탁자 책임(스튜어드십 코드) 활동 가이드라인’에서 밝힌 소송 범위가 너무 넓거나 모호해 국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 대부분은 언제 무슨 일로 소송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거대한 행동주의 펀드가 되겠다고 작정한 모양새다. 가뜩이나 대내외 경제환경이 불확실한 마당에 국민연금발(發) 소송사태라도 벌어진다면 기업활동이 급격히 위축될 게 분명해 보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법 개정안도 기업들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공정경제’나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 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담고 있는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외국계 헤지펀드들의 공격으로 국내 기업 경영권이 크게 위협받을 것이란 관측이다. 전속고발제를 폐지하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공정위만 행사하던 고발권을 손에 넣는 순간 무분별한 ‘별건 수사’로 기업활동이 마비될 것이란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사내 도급과 재하청을 전면 금지하고 사고 발생 시 도급인의 처벌을 훨씬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도 그렇다.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되는데도 지난해 말 국회를 전격 통과했다. “어디 한 번 걸리기만 해 보라”는 식의 이런 함정이 도처에 널렸다. 지금도 정상적인 경영판단조차 배임으로 몰아 기업인을 처벌하는 판국이다. 기업을 옥죄는 ‘유죄 추정’이나 ‘유죄 단정’ 조항들로 가득찬 법 개정안이 쏟아지면 제대로 된 기업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은 “2월 초까지는 혁신성장에 방점을 두고 이후에는 공정경제도 독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기업인 상대 손해배상 소송 요건이나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이 그런 흐름을 예고하는 것이라면 우려스럽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규제개혁을 말하고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면 혁신성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경영권이 흔들리고 언제 소송당할지 모를 환경에서는 어떤 기업도 혁신 투자에 나서기 어렵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지금도 기업들이 죽겠다는데 20대 국회 들어 발의된 기업 관련 법안 1500여 개 중 800개 이상이 규제 법안”이라고 개탄한 바 있다. 손경식 경총 회장도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으로) 국내 기업에 주어지는 여러 제약이 경쟁국가보다 무겁다면 국제 경쟁력이 위축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영을 ‘감옥 갈 각오’로 해야 할 정도로 기업인들이 공포를 느끼는 나라가 돼 가고 있는데 경제 활력을 높이겠다는 정부 말을 누가 믿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