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인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앞에서 두 번째)이 22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이행추진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회의는 노 실장 취임 이후 처음 열렸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이 참석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인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앞에서 두 번째)이 22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이행추진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회의는 노 실장 취임 이후 처음 열렸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이 참석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북핵 정책이 중대 기로에 섰다. 검증을 전제로 한 완전한 핵폐기에서 물러나 ‘핵동결’을 북한의 비핵화 조치로 수용할 모양새다. 2박3일의 ‘스톡홀름 협상’ 직후 미 국무부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 문구를 뺀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북한이 12년 전인 2007년 2·13 베를린 선언에서 활용했던 ‘핵동결’ 카드가 미·북 2차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완전한 비핵화’ 문구 사라진 미국 발표문

미 국무부는 21일(현지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 간 전화통화 사실을 공개했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스톡홀름 협상 등에 대해 한·미 외교수장이 긴밀히 공유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우리 정부는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중재 역할을 맡아 미·북 대표들과 함께했다.

미 국무부는 북핵과 관련한 한·미 공조를 강조할 때면 언제나 ‘완전한 비핵화, 제재 유지’를 포함시켰다. 이날 발표문엔 그러나 두 가지 문구 모두 빠졌다. 폼페이오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의 통화를 설명하면서 “FFVD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힌 것과 대조적이다. 미·북이 2차 정상회담에서 ‘핵동결·미사일 폐기-일부 제재완화’를 맞교환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일관되게 ‘완전한 비핵화 없이는 제재완화도 없다’는 원칙에서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른바 ‘최대한의 제재(maximum pressure)’가 북의 위협을 멈췄다는 논리를 펴왔다. 변화가 감지된 건 올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이후다.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미국민의 안전”이라고 했다.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탄도미사일(ICBM) 제거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미국 조야에선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 중에도 핵무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며 ‘핵동결’이 선결 과제임을 부각시켰다. 김정은과의 2차 정상회담 성사로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과 맞물리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바뀌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北, 12년 전 핵동결 카드로 ‘시간벌기’

북핵 전문가들은 북한의 전형적인 ‘시간 벌기’ 전략에 미국이 또다시 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03~2007년에 이뤄진 6자회담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우려다. 남북을 비롯해 미·중·일·러 4국이 협상한 6자회담은 2007년 ‘2·13 베를린 선언’이란 결과물을 냈다. 당시 북한은 영변핵시설 폐쇄 및 불능화, 핵사찰 수용에 합의했다. 그 대가로 다른 참가국들은 중유 100만t 등의 경제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합의를 깨고 핵시설 봉인을 뜯어냈고, 결국 핵실험에 성공했다.

북한은 이번에도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핵을 ‘교환수단’으로 경제적 지원 및 투자를 받으려 할 뿐만 아니라,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겠다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핵을 갖고 있어도 북한은 위험하지 않으며, 핵을 사용할 의지가 없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려 한다는 얘기다. 미·일 정보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최소 15기가량의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동결이란 12년 전 ‘카드’를 수용하는 대가로 김정은과 2차 정상회담을 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에 우려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핵동결은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

미국의 양보엔 우리 정부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초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미국과 북한 간 ‘선(先)신뢰 회복, 후(後) 비핵화 조치’를 강조한 바 있다. 핵동결, ICBM 폐기 등 미국이 당장 우려하는 것부터 해소해 신뢰를 회복한 뒤에 핵무기·시설 목록 제출이란 ‘큰 바위’에 접근할 수 있다는 논법이다.

강 장관도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핵화 과정에 필요한 조치들은 많지만 꼭 순서대로 이뤄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신고와 검증이란 지난한 절차에 집착하다가 협상 테이블 자체를 걷어차기보다는 미·북 정상 간 신뢰 회복을 통해 비핵화로 나아가는 ‘톱 다운 방식’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우리 정부가 나서 ‘핵보유국 북한’을 인정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인도, 파키스탄 같은 핵보유국과도 미국이 국교를 맺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핵동결 및 미사일 폐기로 합의가 됐더라도 이것이 북핵 협상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며 “북한이 기존 핵무기를 확실히 없애겠다는 얘기를 했느냐가 향후 비핵화 프로세스 성공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휘/김채연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