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한경닷컴 뉴스래빗
/ 사진=한경닷컴 뉴스래빗
# 30대 직장인 김모씨는 중형 승용차를 한 대 구입하기 위해 대리점을 찾았다. 김씨는 신차 매매 계약서를 쓰다 판매 직원에게 ‘레몬법’ 조항을 넣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공문이나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형 ‘레몬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국토교통부와 완성차 업체, 수입차 브랜드 간 엇박자 속에 소비자만 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방치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레몬법은 신차 구매 후 하자가 또다시 발생하면 중재를 거쳐 교환 또는 환불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자동차관리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일컫는다. 중대한 하자가 2회, 일반 하자는 3회 넘게 일어나 수리를 받은 경우 해당된다.

이 법은 ‘달콤한 오렌지인 줄 알고 샀는데 신맛이 강한 레몬이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1975년 제정된 미국의 소비자 보호법이 원조다.

국토부는 이 같은 개정안을 지난 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한 달간 신차 매매계약에 반영된 건 ‘전무’ 하다시피 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국토부는 지난 25일 업계 관계자를 불러 “적극 참여해 조속히 정착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완성차 업체와 수입차 브랜드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은 국토부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국토부는 지난 9일 자동차안전‧하자 심의위원회의 의결을 통해 ‘교환·환불 중재규정’을 마련했다. 그 다음날인 10일 완성차 업체 등에 중재규정을 통보했다. 일명 레몬법은 ‘심의위원회 구성→중재규정 제정→제조사 수락→신차 매매’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중재규정 제정(9일)이 시행일(1일)보다 늦었다. 완성차 업체와 수입차 브랜드는 현재 중재규정에 대한 검토와 조율을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신차 교환이나 환불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완성차 업체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완성차 업체와 수입차 브랜드가 중재규정을 수락하더라도 4~5주가량 시간은 더 걸린다. 판매 직원 교육과 매매 계약서 변경, 내부 전산망 수정 등이 필요해서다. 한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레몬법을 지키겠다는 입장”이라며 “그러나 준비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솔직히 당황스럽다”며 “중재규정을 만들 때 충분한 의견 조율이 이뤄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국토부 관계자는 “개정안을 시행해야 심의위원회의 효력이 생긴다”면서 “1일부터 중재규정을 마련하다 보니 시간차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하나씩 갖춰 나가고 있는 준비 과정”이라고 밝혔다.

국토부와 완성차 업체, 수입차 브랜드가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이 됐다. 당장 신차를 살 때 이미 시행된 레몬법의 적용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신차 매매계약을 체결할 때 교환·환불 관련 내용을 계약서에 반드시 포함해야 해서다. 일부 완성차 업체는 1일 이후 출고된 신차를 소급적용 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고심 중이다.


하종선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국토부가 지난해 7월 말 입법예고한 뒤로 뭘 했는지 모르겠다”며 “뚜렷한 법 체계를 사전에 좀 더 완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정하겠다는 목표 외에 업계와의 스킨십이 부족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 역시 “레몬법은 지금 ‘개점휴업’ 상황”이라며 “국토부가 충분한 소통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대로 시행되려면 최소 1년여가 더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레몬법의 구조적 문제를 둘러싼 불협화음도 일고 있다. 하 변호사는 “하자가 1회 발생하면 교환 또는 환불 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기술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지금 레몬법은 ‘흘러간 노래’”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 신차 인도 후 6개월이 지나면 소비자가 직접 하자가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점도 문제가 있다고 봤다. 소비자가 제조사를 상대로 기계적 결함을 원인을 밝히기는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는 판단에서다.

업계는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레몬법이 지나치게 관대하면 이를 악용하는 블랙 컨슈머가 등장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또 지금도 제조사 측 책임이 인정되면 교환‧환불을 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박상재 한경닷컴 기자 sangj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