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은 연명의료를 받지 않았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던 구 전 회장이 임종기에 들어서자 의료진은 가족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의 연명의료를 받을 것인지 물었다. 가족들은 “생전에 연명의료를 원치 않았다”며 치료를 거부했고 그는 일반 병실에 누워 가족 사이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지난해 2월 4일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뒤 3만5000여 명이 임종기 연명의료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 환자는 의료기관에서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받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다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줄이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명의료 중단한 환자 늘었지만…25만명은 아직 '존엄한 죽음' 기로에
사망자 12%만 연명의료 거부

보건복지부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국내에서 임종기에 연명의료를 받지 않은 환자는 3만5431명이다. 지난해 사망자(28만5534명)의 12% 정도만 연명의료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제도 시행 6개월 만인 지난해 8월 3일까지 1만4787명이 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사망했던 것과 비교하면 2.4배 정도 늘었지만 여전히 적은 수다. 웰다잉시민운동 운영위원회 이사를 맡고 있는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건강사회정책실장)는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한 이유는 모든 임종기 환자가 치료과정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며 “나머지 25만 명은 자기결정권을 갖고 임종을 맞이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임종 과정을 결정할 수 있다. 건강할 때 미리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두면 임종기에 불필요한 치료를 받지 않게 된다. 치료해도 낫기 힘든 임종기에 접어든 뒤 의료진과 상의해 연명의료계획서를 쓸 수도 있다. 환자가 이 같은 서류를 남기지 않았다면 가족이 결정한다.

가족동의 한계, 서약서 작성도 불편

환자가 존엄한 죽음을 결정할 수 있지만 환자 스스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결정한 비율은 31.5%(1만1162명)에 불과했다. 여전히 3명 중 2명은 가족이 대신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했다. 대형 대학병원에서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는 전체의 60% 정도다. 말기 암 환자가 많이 찾는 요양병원에서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는 100명 남짓이다. 상당수 환자가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받으며 임종 시기만 늦추고 있다.

전문가들은 존엄한 죽음을 위한 기반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역보건소, 의료기관 등 전국 94곳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쓸 수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 국민이 자주 찾는 의료기관, 지역주민센터 등으로 작성 기관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식 없는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해 연락두절된 가족을 찾아야 하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내야 하는 행정절차도 여전히 걸림돌이다.

윤 교수는 “웰다잉설계사가 자서전과 같은 삶의 기록을 함께 정리하면서 연명의료는 어떻게 할지, 사후 장기기증은 어떻게 할지, 장례와 장묘는 어떤 방식으로 할지 환자가 직접 결정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가족과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업들이 임종 직전 3일 정도 간병휴가를 보내주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