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하면 항상 따라오는 말 중 하나는 ‘노딜 브렉시트’다. 노딜이 브렉시트의 최대 연관 검색어가 된 건 앞으로 브렉시트 정국의 향방을 쉽게 가늠하기 어려워서다. 브렉시트 관련 기사마다 ‘노딜 브렉시트 우려’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사실 정확한 뜻은 ‘어떻게 될 지 나도 모르겠다’에 가깝다. 그래서 노딜 우려는 ‘불확실성 증가’나 ‘안갯 속 정국’ 등으로 바꾸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노딜이 언론의 단골 용어가 된 건 잘 팔리기 때문이다. 노딜을 기사나 칼럼에 넣어야 사람들의 공포심과 불안감을 자극해 많이 읽힐 수 있다.

영국 정치권에서도 노딜의 전략적 가치는 높았다. 그 중에서도 테레사 메이 총리가 큰 재미를 봤다. EU와 협상에선 “나쁜 합의보다 노딜이 더 낫다”는 논리로 지난했던 EU와 싸움을 끝냈고, 영국내에선 본인의 합의안(메이 딜) 가치를 끌어올리려는 ‘노딜 지렛대’론을 썼다. 브렉시트 시행일(3월29일)이 다가올수록 최악(노딜)을 피하기 위해 차악(메이딜)을 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기업들도 투자자나 소비자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노딜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속내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 때문에 ‘노딜’은 죽지 않고 건재했다. 그런 와중에 지난 29일(현지시간) 노딜의 몸값이 더욱 높아졌다. 영국 하원에서 브렉시트 관련 표결이 있던 날이었다.

브렉시트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7개의 대안을 놓고 표결했다. 좀더 간단히 말하면 세가지 브렉시트 시나리오를 두고 승부를 벌였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 ‘1등의 건재’, ‘2등의 몰락’으로 인한 ‘3등의 어부지리’로 끝났다. 구체적으로 그날 7개의 안건 중 2개의 안만 영국의 하원을 통과했다. ‘백스톱’을 대체하는 대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EU와 재협상하자는 안건이 16표 차로 가결됐고, ‘노딜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선언문 형태의 수정안도 8표 차로 하원 벽을 넘었다. 집권당인 보수당과 연립정부 파트너인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이 똘똘 뭉친 결과다. 두 가지 안건 모두 “메이 총리, 힘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메이 총리가 브뤼셀에 가서 노딜 대신 EU와 다시 얘기해보라는 내용이다.

반면 제1야당인 노동당은 참패했다. 다음 달 말까지 메이 정부의 합의안이 영국 의회 비준을 받지 못하면 EU 탈퇴 시점을 9개월 연장하는 안건과 메이 정부 힘을 빼고 의회에 브렉시트 협상력을 실어주는 수정안은 부결됐다.

결론적으로 ‘플랜B’든 ‘플랜C’든 메이 정부의 합의안대로 가는 안이 1등을 유지했다. 노동당 의도대로 제 2국민투표나 조기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브렉시트 시행을 연기하는 안건은 퇴짜를 맞았다. 이 때문에 3등으로 살아 남았던 노딜 브렉시트는 2등으로 올라갔다. 2등이었던 브렉시트 연기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생긴 ‘어부지리’다.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노딜의 결정권이 영국에서 EU로 넘어온 사실이다. 영국은 의회를 중심으로 노딜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EU가 영국과 브렉시트 재협상에 반대하고 있어서다.“백스톱은 브렉시트 합의안의 핵심으로 이걸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맞서 영국은 “백스톱 발동을 방지하거나 영구적 조치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정치적 선언 형태로 개정하려 할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 나온 문구처럼 재협상이 아니라 개정협상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재협상으로 생각하는 EU가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지가 관건이다. 메이 총리가 본인이 정한 협상 데드라인인 다음달 13일까지 성과를 낼 수 있을 지 주목된다.

런던=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