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다시 살아난 김복동 할머니" 옛 일본대사관 앞 영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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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장례식장 발인후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서울광장 운구
서울광장서 옛 일본대사관까지 추모행진…"일본, 공식 사과하라"
옛 일본대사관 앞 추모객 1천여명 모여 추모…영결식 뒤 장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이 1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엄수됐다.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시민장 장례위원회' 주관으로 거행된 영결식에는 추모객 1천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판소리 공연팀 바닥소리의 '상여소리' 공연으로 시작한 영결식은 묵념, 추모 영상 상영, 할머니 소개와 추모사,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권미경 연세대학교의료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추모사에서 "진통제도 듣지 않는 고통에 힘들어하던 할머니가 '엄마, 엄마, 너무 아파'라고 외칠 때 손밖에 잡아드릴 수 없어 답답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어 "그 오랜 세월 모진 상처 잘 견디고 잘 싸웠다고 어머니가 꼭 안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그곳으로 가시길 바란다"며 "할머니 훨훨 날아서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로 가세요"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어 무대에 오른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는 "할머니의 삶은 이해성과 극단 고래의 나침반이 됐다"며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여성인권운동가로 전 세계를 누비시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살아오신 삶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아줬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이어 이 대표는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할머니와 함께 평화의 세상을 만들겠다.
할머니 마음껏 사랑받고 행복하세요"라며 오열했다.
상주 역할을 맡은 윤미향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대표는 "김복동 할머니를 추모하고 뒤따르고자 결심하는 수많은 나비가 날갯짓했던 지난 닷새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추모객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그는 "마침내 죽음도 이겨내고 바람을 일으켜 이 땅의 평화로 할머니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다음 주 수요일 김복동 할머니는 이곳(수요시위 장소)에 앉아 계실 것이다.
평화와 인권이 필요한 곳에 준엄한 목소리로, 격려의 목소리로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헌화를 마지막으로 영결식을 마친 뒤 11시 30분께 운구차는 장지로 떠났다.
장지는 천안 망향의동산이다.
앞서 김 할머니의 발인은 이날 오전 6시께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윤미향 정의연 대표와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등 정의연 관계자 40여명은 김 할머니 빈소에서 헌화하고 큰절을 2번 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일부는 눈물을 훔치며 김 할머니를 추모했다.
오전 6시 30분께 1층 영결식장에서 김 할머니를 모신 관이 나왔다.
윤홍조 마리몬드 대표가 영정사진을 들고 운구차로 이동했다.
윤미향 대표와 이 할머니 등 40여명이 뒤따랐다.
윤미향 대표는 매직펜으로 '훨훨 날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길이길이 행복을 누리소서'라고 관에 적었다.
김 할머니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자 정의연 관계자 등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묵념했다.
이어 운구차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으로 향했다.
평화의 우리집은 김 할머니가 생전에 머물던 곳이다.
운구차 앞에는 양팔을 벌리고 환한 표정을 짓는 김 할머니의 사진을 설치하고, 꽃으로 장식한 트럭이 길을 안내했다.
경찰차와 경찰 오토바이가 교통을 통제하며 함께 이동했다. 오전 7시 5분께 운구차가 평화의 우리집 앞에 도착했다.
윤미향 대표와 이 할머니 등 40여명도 버스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발인식 내내 눈물을 참았던 참석자들은 집 앞에서 이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평화의 우리집 안에 영정사진과 윤미향 대표 등이 들어가자 김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길원옥 할머니가 영정사진을 양손으로 어루만졌다.
길 할머니는 "왜 이렇게 빨리 가셨어. 이렇게 빨리 안 갔어도 좋은데"라며 "먼저 좋은 데 가서 편안히 계세요.
나도 이따가 갈게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어 김 할머니가 생전에 지냈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 대표는 김 할머니 방 안의 장롱 앞에서 "할머니 저 외출복 수요시위 갈 때 입었던 저 옷 어떡하지. 그대로 잘 둘게. 할머니"라고 말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참석자들은 통곡했다.
영정사진과 함께 윤미향 대표 등이 집을 나서자 길 할머니는 현관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침통한 표정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들은 다시 버스에 올랐고, 운구차와 함께 김 할머니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으로 이동했다. 서울광장에서는 정의연과 시민 1천여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김 할머니를 위한 추모 행진을 시작했다.
김 할머니 영정사진을 든 윤홍조 대표가 선두에 서고 그 뒤로 운구차와 현수막, 만장 94개를 든 시민들이 뒤따랐다.
만장을 들지 않은 시민들은 노란색 나비 모양의 종이가 달린 막대를 들었다.
한국 나이로 94세인 김 할머니를 기리는 의미에서 만장 94개를 만들었다.
현수막에는 '김복동님 나비 되어 훨훨 날으소서'라고 적혀있었다.
만장에는 '김복동 우리의 영웅, 희망, 마마', '일본은 조선학교 처벌 마라', '전쟁 없는 통일된 나라', '일본군 성노예 책임자 처벌', 전시 성폭력 없는 세상' 등이 적혀있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큰 꿈을 이뤄 드리겠습니다"라는 정의연 관계자의 발언과 함께 행진이 시작됐고, 시민들은 함성을 질렀다.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방송차에서는 "하루빨리 해결 지으라고 일본 정부에 전하세요.
알겠습니까",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고 이렇게 싸웠나.
1천억을 준다 해도 받을 수 없다.
하루빨리 사죄하라"를 외치는 김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행진 참가자들은 광화문광장을 지나 오전 9시 50분께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도착했다.
"김복동 할머니 기억하겠습니다.
할머니 꿈 반드시 이루겠습니다"라는 정의연 관계자의 발언이 나오자 참가자들은 다시 옛 일본대사관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이어 "일본은 공식 사과하라", "법적 배상을 이행하라" 구호를 외쳤다. /연합뉴스
서울광장서 옛 일본대사관까지 추모행진…"일본, 공식 사과하라"
옛 일본대사관 앞 추모객 1천여명 모여 추모…영결식 뒤 장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이 1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엄수됐다.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시민장 장례위원회' 주관으로 거행된 영결식에는 추모객 1천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판소리 공연팀 바닥소리의 '상여소리' 공연으로 시작한 영결식은 묵념, 추모 영상 상영, 할머니 소개와 추모사,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권미경 연세대학교의료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추모사에서 "진통제도 듣지 않는 고통에 힘들어하던 할머니가 '엄마, 엄마, 너무 아파'라고 외칠 때 손밖에 잡아드릴 수 없어 답답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어 "그 오랜 세월 모진 상처 잘 견디고 잘 싸웠다고 어머니가 꼭 안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그곳으로 가시길 바란다"며 "할머니 훨훨 날아서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로 가세요"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어 무대에 오른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는 "할머니의 삶은 이해성과 극단 고래의 나침반이 됐다"며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여성인권운동가로 전 세계를 누비시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살아오신 삶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아줬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이어 이 대표는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할머니와 함께 평화의 세상을 만들겠다.
할머니 마음껏 사랑받고 행복하세요"라며 오열했다.
상주 역할을 맡은 윤미향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대표는 "김복동 할머니를 추모하고 뒤따르고자 결심하는 수많은 나비가 날갯짓했던 지난 닷새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추모객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그는 "마침내 죽음도 이겨내고 바람을 일으켜 이 땅의 평화로 할머니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다음 주 수요일 김복동 할머니는 이곳(수요시위 장소)에 앉아 계실 것이다.
평화와 인권이 필요한 곳에 준엄한 목소리로, 격려의 목소리로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헌화를 마지막으로 영결식을 마친 뒤 11시 30분께 운구차는 장지로 떠났다.
장지는 천안 망향의동산이다.
앞서 김 할머니의 발인은 이날 오전 6시께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윤미향 정의연 대표와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등 정의연 관계자 40여명은 김 할머니 빈소에서 헌화하고 큰절을 2번 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일부는 눈물을 훔치며 김 할머니를 추모했다.
오전 6시 30분께 1층 영결식장에서 김 할머니를 모신 관이 나왔다.
윤홍조 마리몬드 대표가 영정사진을 들고 운구차로 이동했다.
윤미향 대표와 이 할머니 등 40여명이 뒤따랐다.
윤미향 대표는 매직펜으로 '훨훨 날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길이길이 행복을 누리소서'라고 관에 적었다.
김 할머니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자 정의연 관계자 등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묵념했다.
이어 운구차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으로 향했다.
평화의 우리집은 김 할머니가 생전에 머물던 곳이다.
운구차 앞에는 양팔을 벌리고 환한 표정을 짓는 김 할머니의 사진을 설치하고, 꽃으로 장식한 트럭이 길을 안내했다.
경찰차와 경찰 오토바이가 교통을 통제하며 함께 이동했다. 오전 7시 5분께 운구차가 평화의 우리집 앞에 도착했다.
윤미향 대표와 이 할머니 등 40여명도 버스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발인식 내내 눈물을 참았던 참석자들은 집 앞에서 이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평화의 우리집 안에 영정사진과 윤미향 대표 등이 들어가자 김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길원옥 할머니가 영정사진을 양손으로 어루만졌다.
길 할머니는 "왜 이렇게 빨리 가셨어. 이렇게 빨리 안 갔어도 좋은데"라며 "먼저 좋은 데 가서 편안히 계세요.
나도 이따가 갈게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어 김 할머니가 생전에 지냈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 대표는 김 할머니 방 안의 장롱 앞에서 "할머니 저 외출복 수요시위 갈 때 입었던 저 옷 어떡하지. 그대로 잘 둘게. 할머니"라고 말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참석자들은 통곡했다.
영정사진과 함께 윤미향 대표 등이 집을 나서자 길 할머니는 현관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침통한 표정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들은 다시 버스에 올랐고, 운구차와 함께 김 할머니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으로 이동했다. 서울광장에서는 정의연과 시민 1천여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김 할머니를 위한 추모 행진을 시작했다.
김 할머니 영정사진을 든 윤홍조 대표가 선두에 서고 그 뒤로 운구차와 현수막, 만장 94개를 든 시민들이 뒤따랐다.
만장을 들지 않은 시민들은 노란색 나비 모양의 종이가 달린 막대를 들었다.
한국 나이로 94세인 김 할머니를 기리는 의미에서 만장 94개를 만들었다.
현수막에는 '김복동님 나비 되어 훨훨 날으소서'라고 적혀있었다.
만장에는 '김복동 우리의 영웅, 희망, 마마', '일본은 조선학교 처벌 마라', '전쟁 없는 통일된 나라', '일본군 성노예 책임자 처벌', 전시 성폭력 없는 세상' 등이 적혀있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큰 꿈을 이뤄 드리겠습니다"라는 정의연 관계자의 발언과 함께 행진이 시작됐고, 시민들은 함성을 질렀다.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방송차에서는 "하루빨리 해결 지으라고 일본 정부에 전하세요.
알겠습니까",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고 이렇게 싸웠나.
1천억을 준다 해도 받을 수 없다.
하루빨리 사죄하라"를 외치는 김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행진 참가자들은 광화문광장을 지나 오전 9시 50분께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도착했다.
"김복동 할머니 기억하겠습니다.
할머니 꿈 반드시 이루겠습니다"라는 정의연 관계자의 발언이 나오자 참가자들은 다시 옛 일본대사관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이어 "일본은 공식 사과하라", "법적 배상을 이행하라" 구호를 외쳤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