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그해 2월 8일 도쿄
그날 도쿄엔 함박눈이 내렸다. 30년 만의 대설이었다. 헌책방이 몰려 있던 간다(神田) 거리의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에도 눈이 펑펑 내렸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600명이 넘었다. 오후 2시 시작된 ‘조선유학생 학우회’ 모임은 곧 ‘조선청년독립단’의 ‘독립선언식’으로 바뀌었다.

100년 전인 1919년 2월8일 도쿄에서 열린 ‘2·8독립선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유학생 대표 백관수가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주창하자 독립만세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웠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경찰이 들이닥쳤다. 현장에서 27명이 체포됐다. 이 소식은 ‘차이나 프레스’와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를 통해 세계로 퍼졌다.

12일에는 100여 명이 히비야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려다 13명이 구속됐다. 23일에도 선언서 배포 도중 5명이 붙잡혔다. 여학생 김마리아는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복사해 옷 속에 감추고 귀국해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전국에 알렸다. 식민지 종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은 3·1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됐다.

100년 전 2·8 독립 선언 장소는 현재 세탁소 건물로 바뀌었다. 와세다대 학생이던 이광수가 선언서를 작성했던 식당은 지난해 폐업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만세시위를 벌인 히비야공원에서도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1923년 대지진 때 소실된 YMCA회관에서 600여m 떨어진 곳으로 옮겨온 새 회관에 기념비만 덩그러니 서 있다.

내일 도쿄와 서울 YMCA회관에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동시에 개최된다. 미국과 캐나다 러시아 호주에서도 관련 행사가 열린다. 모두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3000리 강토의 새 국가를 건설하겠다’던 당시의 결의를 되새기자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반쪽 국가로 남아 있다. 주변 열강의 군사대국화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한·일 갈등을 빚은 해상초계기만 해도 일본은 110대 이상 보유하고 있다. 한국의 16대보다 7배 많다. 해군 함정 규모도 일본이 46만t으로 한국 19만t의 2.5배다. 일본은 항공모함 운영까지 검토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항공모함을 갖고 있다. 잠수함도 중국과 러시아 각 62척, 일본 19척, 북한 70척에 이른다. 우리 잠수함은 10척에 불과하다.

100년 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되짚어보며 다시금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우리의 운명을 돌아본다. 과거 ‘10만 양병설’을 무시하고 임진왜란을 맞았던 400여 년 전의 비극적인 역사도 함께 떠올려본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