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톨레랑스 제로'로 치닫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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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 프레임 떨쳐내지 못하는 한국 정치
서로 절제하고 法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프랑스식 톨레랑스의 참뜻 되새겨야 할 때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국제협상학 >
서로 절제하고 法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프랑스식 톨레랑스의 참뜻 되새겨야 할 때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국제협상학 >
오후 9시 문을 닫기 전 슈퍼마켓에 달려가 계산대 앞에 늘어선 줄에 섰다. 한참을 기다려 차례가 됐는데 시계가 정각 9시를 가리킨다. 순간 계산원이 자리를 뜬다. 항의하니 대답이 걸작이다. “기다린 건 당신 사정이고 내 근무시간은 9시까지”라는 것이다. 1980년대 좌파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 시절 파리에서 겪은 일이다. ‘고객은 왕이다’란 말은 미국에서나 통한다.
이 ‘노동자 낙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겨울에 전력회사가 1주일이나 파업을 한다. 그동안 전기난방을 하는 파리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작년 말에는 급기야 경찰까지 “‘노랑 조끼’ 파업에 지쳤으니 처우를 개선해달라”며 거리시위를 하는 데 이르렀다.
물론 이 같은 노동자 낙원의 가장 큰 대가는 10%가 넘는 높은 실업률이다. 청년 실업률은 무려 25%다. 아직 우리는 이런 고실업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소르본대 박사과정에 있던 동료 학생이 어느 날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조그만 중소기업 일자리를 놓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파리의 지하철을 타면 멀쩡하게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구걸을 한다. 일하던 기업이 망했다는 것이다. 고실업 사회에선 재취업 기회가 없다.
이런 나라는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다. 그런데 프랑스는 경제대국의 반열에서 탈락하지 않았다. 기초기술이나 산업 기반이 확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사회 전반에 흐르는 ‘톨레랑스(tolerance)’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무리 거칠게 다투더라도 서로 ‘넘지 말아야 선’은 넘지 않으며 정적(政敵)에 대해 관용하고 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선 좌파 정권과 우파 정권 사이의 톨레랑스다. 대개 7년마다 좌우가 돌아가며 집권하는데 누가 권력을 잡든 전임 정권에 대해선 톨레랑스를 가진다. 잘못된 정책은 비판하지만 상대의 정치이념과 통치철학은 인정해준다. 자크 시라크 보수 정부에서 진보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를 한 것처럼 필요하다면 진보와 보수가 손잡고 국정을 운영한다.
둘째, 집권세력의 관료 조직에 대한 톨레랑스다. 프랑스는 국립행정학교(ENA) 같은 그랑제콜 출신의 소수 엘리트 관료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관료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관료들은 집권세력이 좌회전을 하든 우회전을 하든 프랑스를 위한 제 갈 길을 ‘똑바로’ 간다.
셋째, 강성처럼 보이는 프랑스 노조도 나름대로 톨레랑스가 있다. 아무리 파업을 해도 법의 테두리 속에서 움직인다. 우리와 같은 공장 점거, 기업인 폭행 같은 불법행위는 거의 없다. “우리 노조는 좌파 정부의 전위부대가 아니다.” 프랑스 최대 노조인 노동총연맹(CGT) 위원장을 지낸 티에리 르퐁의 말이다. 근로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빗나간 정치적 야합이나 지나친 이념투쟁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 같은 톨레랑스는 어디서 온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 때 좌파 자코뱅당과 우파 지롱드당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보복과 대응 보복의 대혼란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영구집권하는 독재국가에선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해도 된다. 하지만 선거로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민주국가에선 그래선 안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톨레랑스 제로(0) 사회’로 치닫고 있다. 전임 대통령들, 대법원장을 감옥에 넣은 것도 모자라 보수 정권이 한 일은 모조리 잘못했다는 ‘과(過)10 공(功)0’로 몰아붙이고 있다. 중국 덩샤오핑조차 자신을 핍박하고 문화대혁명으로 국정을 농단한 마오쩌둥을 ‘공7 과3’으로 평가했는데 말이다. 한편 언제 이유도 모르게 두들겨 맞을지 모르는 관료들은 세종시에 바짝 엎드려 있다. 노조는 현 정권의 최대 수혜자인데도 마냥 자신들의 구호만 외쳐댄다.
한때 우리 정치에도 톨레랑스가 있었다. 전임 대통령이 외환위기로 국가부도를 내고, 이해하기 힘든 대북 현금지원을 했어도 후임자들이 통치행위로 보고 법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이제 갈등과 보복이 아닌, 프랑스식 톨레랑스의 참뜻을 되새길 때다. ‘드루킹 사건’의 법적 심판에서 보듯 현 정권도 무결점의 ‘공10 과0’가 아니라는 것이 슬슬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 ‘노동자 낙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겨울에 전력회사가 1주일이나 파업을 한다. 그동안 전기난방을 하는 파리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작년 말에는 급기야 경찰까지 “‘노랑 조끼’ 파업에 지쳤으니 처우를 개선해달라”며 거리시위를 하는 데 이르렀다.
물론 이 같은 노동자 낙원의 가장 큰 대가는 10%가 넘는 높은 실업률이다. 청년 실업률은 무려 25%다. 아직 우리는 이런 고실업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소르본대 박사과정에 있던 동료 학생이 어느 날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조그만 중소기업 일자리를 놓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파리의 지하철을 타면 멀쩡하게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구걸을 한다. 일하던 기업이 망했다는 것이다. 고실업 사회에선 재취업 기회가 없다.
이런 나라는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다. 그런데 프랑스는 경제대국의 반열에서 탈락하지 않았다. 기초기술이나 산업 기반이 확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사회 전반에 흐르는 ‘톨레랑스(tolerance)’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무리 거칠게 다투더라도 서로 ‘넘지 말아야 선’은 넘지 않으며 정적(政敵)에 대해 관용하고 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선 좌파 정권과 우파 정권 사이의 톨레랑스다. 대개 7년마다 좌우가 돌아가며 집권하는데 누가 권력을 잡든 전임 정권에 대해선 톨레랑스를 가진다. 잘못된 정책은 비판하지만 상대의 정치이념과 통치철학은 인정해준다. 자크 시라크 보수 정부에서 진보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를 한 것처럼 필요하다면 진보와 보수가 손잡고 국정을 운영한다.
둘째, 집권세력의 관료 조직에 대한 톨레랑스다. 프랑스는 국립행정학교(ENA) 같은 그랑제콜 출신의 소수 엘리트 관료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관료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관료들은 집권세력이 좌회전을 하든 우회전을 하든 프랑스를 위한 제 갈 길을 ‘똑바로’ 간다.
셋째, 강성처럼 보이는 프랑스 노조도 나름대로 톨레랑스가 있다. 아무리 파업을 해도 법의 테두리 속에서 움직인다. 우리와 같은 공장 점거, 기업인 폭행 같은 불법행위는 거의 없다. “우리 노조는 좌파 정부의 전위부대가 아니다.” 프랑스 최대 노조인 노동총연맹(CGT) 위원장을 지낸 티에리 르퐁의 말이다. 근로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빗나간 정치적 야합이나 지나친 이념투쟁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 같은 톨레랑스는 어디서 온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 때 좌파 자코뱅당과 우파 지롱드당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보복과 대응 보복의 대혼란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영구집권하는 독재국가에선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해도 된다. 하지만 선거로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민주국가에선 그래선 안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톨레랑스 제로(0) 사회’로 치닫고 있다. 전임 대통령들, 대법원장을 감옥에 넣은 것도 모자라 보수 정권이 한 일은 모조리 잘못했다는 ‘과(過)10 공(功)0’로 몰아붙이고 있다. 중국 덩샤오핑조차 자신을 핍박하고 문화대혁명으로 국정을 농단한 마오쩌둥을 ‘공7 과3’으로 평가했는데 말이다. 한편 언제 이유도 모르게 두들겨 맞을지 모르는 관료들은 세종시에 바짝 엎드려 있다. 노조는 현 정권의 최대 수혜자인데도 마냥 자신들의 구호만 외쳐댄다.
한때 우리 정치에도 톨레랑스가 있었다. 전임 대통령이 외환위기로 국가부도를 내고, 이해하기 힘든 대북 현금지원을 했어도 후임자들이 통치행위로 보고 법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이제 갈등과 보복이 아닌, 프랑스식 톨레랑스의 참뜻을 되새길 때다. ‘드루킹 사건’의 법적 심판에서 보듯 현 정권도 무결점의 ‘공10 과0’가 아니라는 것이 슬슬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