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비판이 비판다워야…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진영 논리 맞지 않으면 무조건 공격 대상
도 넘은 정치 편향에 공정성 잃은 매체들
억지가 진실 왜곡하고 여론 오도해서야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도 넘은 정치 편향에 공정성 잃은 매체들
억지가 진실 왜곡하고 여론 오도해서야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칼럼을 쓴다는 건 매우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다 보니 의견이 다른 독자도 적지 않아서다. 아무리 정확한 팩트와 정연한 논리로 엮어낸다 해도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직접적인 반응은 인터넷 댓글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메일을 보내오거나 전화를 걸어오는 독자들도 있다. 절반은 반대 의견이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진 않는다. 차분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마운 분들이다. 그런 건전한 비판은 나중에라도 칼럼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요즘은 답답할 때가 많다. 막무가내식 억지 탓이다. 언어폭력 수준인 인터넷 댓글은 그러려니 한다. 문제는 정치 편향의 인터넷 매체와 공정성을 잃은 방송 매체들이다. 하긴 그들이 뭐라 한들 관심은 없다. 다만 그들의 억지가 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오도한다는 사실이 답답할 따름이다.
얼마 전 ‘국민을 세금으로 벌주는 나라’라는 칼럼을 썼다. 과도한 증세에 대한 걱정이었다. 정부가 ‘부자 증세’에 몰두한 탓에 ‘건전한 부’까지 비난받는 사회가 됐다며 평생 노력까지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불합리한 세제는 곤란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칼럼을 몇몇 인터넷 매체와 방송 시사 프로그램이 비난을 한 모양이다. 흥분한 독자들이 이런 편파 왜곡 방송이 있냐며 연락을 줘서 찾아봤다. 가관도 아니었다. 억지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1%에 불과한 과세 대상자를 전체 국민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었다. 선전과 선동이라는 극단적인 용어까지 동원됐다. 1%의 과세 대상자는 국민도 아니라는 듯 말이다. 칼럼의 계기가 된 단독주택 공시가격의 ‘세금 폭탄’ 대상은 상위 1.7%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 부자가 되고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왔는지는 관계없다. 오히려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는 게 징벌이라면 가난한 사람에게 많이 걷어야 조세 정의냐고 되묻는다. 이 사람들 말투가 늘 그렇다. 국민개세(皆稅)는 우리의 헌법 정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실상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건 언급조차 않는다.
근로자의 46.8%가 근로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나라다. 상위 1% 근로소득자가 전체 근로소득세의 32.6%를, 상위 10%가 75.9%를 부담한다. 부자들은 그저 세금 내는 기계다. 개인만이 아니다. 상위 0.1% 기업이 전체 법인세의 62%를 부담하고, 1% 기업이 83%를 낸다. 세 부담 편중은 언급하지 않고 대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의 대상을 삼는 사람들이다. 부자와 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갈라치기 해야 속이 시원하다. 99 대 1, 90 대 10의 논리다.
이 사람들, 한술 더 떠서 외국의 보유세와 공시가격에 대해서는 왜 보도하지 않는지를 따져 물었다.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보도가 필요한가. 공시가격만 해도 그렇다. 미국은 우리처럼 일괄적으로 과표 기준을 정하지 않는다는 보도가 한두 번이 아니다. 최초 매입가가 재산세의 과표 기준이라고 말이다. 같은 동네, 같은 크기 주택이라도 보유세가 다르다. 그래서 재산세를 미리 알고 현금흐름을 감안해 집을 산다. 그래서 세금이 갑자기 오르는 일도 없다. 그런 보도가 나갈 땐 뭘 하고 있었는지.
미국은 보유세율이 높지만 집과 관련된 각종 이자와 비용을 소득에서 공제해주는 까닭에 실제 부담액은 훨씬 낮다는 얘기, 납세자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거나 부담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면제해주거나 경감해준다는 내용, 다 보도했다. 왜 이런 건 말하지 않나.
집값을 떨어뜨리기 위해 보유세를 올리려면 다른 나라처럼 거래세를 대폭 낮춰 출구라도 마련해줘야 한다는 언론의 주장 역시 허공의 메아리가 된 지 오래다. 이 사람들, 그래 놓고 언론이 프레임을 짜놓고 일방적으로 보도한다고 정색한다.
칼럼에서 지적했듯 “종합부동산세는 부유세라는 표현이 솔직할 것 같다”고 말한 건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세금으로 국민을 벌준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비판을 왜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비판을 하려면 비판다워야 한다. 명백한 팩트에 정연한 논리는 필수다. 그렇지 않으니 억지이자 매도일 뿐이다. 정파적 주장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말라. 스스로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언론이라 하지 않겠나.
직접적인 반응은 인터넷 댓글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메일을 보내오거나 전화를 걸어오는 독자들도 있다. 절반은 반대 의견이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진 않는다. 차분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마운 분들이다. 그런 건전한 비판은 나중에라도 칼럼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요즘은 답답할 때가 많다. 막무가내식 억지 탓이다. 언어폭력 수준인 인터넷 댓글은 그러려니 한다. 문제는 정치 편향의 인터넷 매체와 공정성을 잃은 방송 매체들이다. 하긴 그들이 뭐라 한들 관심은 없다. 다만 그들의 억지가 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오도한다는 사실이 답답할 따름이다.
얼마 전 ‘국민을 세금으로 벌주는 나라’라는 칼럼을 썼다. 과도한 증세에 대한 걱정이었다. 정부가 ‘부자 증세’에 몰두한 탓에 ‘건전한 부’까지 비난받는 사회가 됐다며 평생 노력까지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불합리한 세제는 곤란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칼럼을 몇몇 인터넷 매체와 방송 시사 프로그램이 비난을 한 모양이다. 흥분한 독자들이 이런 편파 왜곡 방송이 있냐며 연락을 줘서 찾아봤다. 가관도 아니었다. 억지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1%에 불과한 과세 대상자를 전체 국민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었다. 선전과 선동이라는 극단적인 용어까지 동원됐다. 1%의 과세 대상자는 국민도 아니라는 듯 말이다. 칼럼의 계기가 된 단독주택 공시가격의 ‘세금 폭탄’ 대상은 상위 1.7%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 부자가 되고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왔는지는 관계없다. 오히려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는 게 징벌이라면 가난한 사람에게 많이 걷어야 조세 정의냐고 되묻는다. 이 사람들 말투가 늘 그렇다. 국민개세(皆稅)는 우리의 헌법 정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실상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건 언급조차 않는다.
근로자의 46.8%가 근로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나라다. 상위 1% 근로소득자가 전체 근로소득세의 32.6%를, 상위 10%가 75.9%를 부담한다. 부자들은 그저 세금 내는 기계다. 개인만이 아니다. 상위 0.1% 기업이 전체 법인세의 62%를 부담하고, 1% 기업이 83%를 낸다. 세 부담 편중은 언급하지 않고 대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의 대상을 삼는 사람들이다. 부자와 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갈라치기 해야 속이 시원하다. 99 대 1, 90 대 10의 논리다.
이 사람들, 한술 더 떠서 외국의 보유세와 공시가격에 대해서는 왜 보도하지 않는지를 따져 물었다.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보도가 필요한가. 공시가격만 해도 그렇다. 미국은 우리처럼 일괄적으로 과표 기준을 정하지 않는다는 보도가 한두 번이 아니다. 최초 매입가가 재산세의 과표 기준이라고 말이다. 같은 동네, 같은 크기 주택이라도 보유세가 다르다. 그래서 재산세를 미리 알고 현금흐름을 감안해 집을 산다. 그래서 세금이 갑자기 오르는 일도 없다. 그런 보도가 나갈 땐 뭘 하고 있었는지.
미국은 보유세율이 높지만 집과 관련된 각종 이자와 비용을 소득에서 공제해주는 까닭에 실제 부담액은 훨씬 낮다는 얘기, 납세자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거나 부담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면제해주거나 경감해준다는 내용, 다 보도했다. 왜 이런 건 말하지 않나.
집값을 떨어뜨리기 위해 보유세를 올리려면 다른 나라처럼 거래세를 대폭 낮춰 출구라도 마련해줘야 한다는 언론의 주장 역시 허공의 메아리가 된 지 오래다. 이 사람들, 그래 놓고 언론이 프레임을 짜놓고 일방적으로 보도한다고 정색한다.
칼럼에서 지적했듯 “종합부동산세는 부유세라는 표현이 솔직할 것 같다”고 말한 건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세금으로 국민을 벌준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비판을 왜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비판을 하려면 비판다워야 한다. 명백한 팩트에 정연한 논리는 필수다. 그렇지 않으니 억지이자 매도일 뿐이다. 정파적 주장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말라. 스스로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언론이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