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용덕 손해보험협회장 "고3때 결핵으로 갈비뼈 제거 '역경 극복'…늘 최선 다해 준비해야 행운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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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대부분 국제금융분야서 근무…외환위기 극복 매진 'Mr. 원' 별명"
고등학교 때 상경, 과외해 가며 공부…용산고 근처서 자취하다 결핵 걸려
대입 예비고사 전날 가까스로 퇴원…軍 신검서 떨어져 행시 공부에 매진
외환위기 때 국제금융전문가 명성…'Mr. 엔' 사카키바라와 긴밀히 협의
관세청장 때 혁신으로 노대통령 눈에들어…2006년 靑 근무땐 집값 안정대책 마련
'인생 운칠기삼'이라지만 평소 준비해야…세상 바뀌어도 세 가지는 꼭 필요해
영어·통계지식 쌓고 '얼리어답터' 돼라…高大 초빙교수 때 6차례 최우수강의상 받아
고등학교 때 상경, 과외해 가며 공부…용산고 근처서 자취하다 결핵 걸려
대입 예비고사 전날 가까스로 퇴원…軍 신검서 떨어져 행시 공부에 매진
외환위기 때 국제금융전문가 명성…'Mr. 엔' 사카키바라와 긴밀히 협의
관세청장 때 혁신으로 노대통령 눈에들어…2006년 靑 근무땐 집값 안정대책 마련
'인생 운칠기삼'이라지만 평소 준비해야…세상 바뀌어도 세 가지는 꼭 필요해
영어·통계지식 쌓고 '얼리어답터' 돼라…高大 초빙교수 때 6차례 최우수강의상 받아
김용덕 손해보험협회장은 젊었을 때 남 못지않게 고생했다고 했다. 특히 고등학생 시절 건강을 해친 것이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 ‘수재’ 소리를 듣던 그는 고등학교 때 상경했다. 여덟 살 터울인 형과 함께 서울에서 자취했다. 밥해 먹는 게 귀찮아서 거를 때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대입을 앞두고 있던 고3 때 늑막염과 결핵에 걸렸다. 결핵이 뼈에 전이되면서 대퇴골과 갈비뼈를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대입 예비고사를 치르기 전날에서야 가까스로 병원에서 퇴원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공직에 입문해서도 김 회장의 행보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재무부에서 ‘요직’으로 불리던 이재국에선 한 번도 근무하지 못했다. 서기관 승진도 고시 후배보다 늦었다. 33년 공직생활의 절반 이상을 국제금융 파트에서 보냈다. 외환위기 직후엔 외환위기 극복에 온몸을 바쳐야만 했다. 관세청장을 지내면서 혁신을 이룬 것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눈에 띄어 금융감독위원장까지 올랐다.
김 회장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저보다 훌륭한 선후배가 많았음에도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건 행운입니다. 제 능력은 일부였을 뿐입니다. ‘운칠기삼’이 아니라 ‘운팔기이’라고나 할까요.”
결핵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생
김 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 효자동에 있는 한정식집인 목련나무집. 미술작품과 도자기 등을 전시하는 가진화랑 내 식당이다.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음식이 아주 정갈하고 담백해요. 어렸을 때 집에서 먹던 음식을 맛보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자리에 앉자마자 샐러드와 모둠전, 콩나물숙주볶음이 맛깔스럽게 차려져 나왔다. 김 회장의 설명대로 가정집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집에서 차린 듯했다.
김 회장은 술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고등학교 때 앓았던 결핵의 후유증 때문이다. “당시엔 결핵약을 한 줌씩 먹어야 했어요. 그렇다 보니 위와 십이지장에 무리가 왔죠. 공직 생활을 할 때도 술을 먹은 다음날엔 항상 고생하곤 했습니다.”
김 회장은 정읍에서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데다 세 살 때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등 어렸을 때 고생을 적잖게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상경한 이후에도 학비를 벌기 위해 과외 등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법조인을 꿈꿨지만 졸업 후 취직을 위해 경영대학을 선택했다. 취직을 원하던 그가 공직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궁금했다. “대학 4학년 때 군대 소집 영장이 나와서 상무대에 입소했습니다. 신검을 받는데 군의관들이 집으로 돌려보내더군요. 결핵 후유증 때문에 위와 십이지장이 안 좋고 밥도 잘 못 먹을 때였죠. 갑자기 시간이 남아 도서관에서 행시 공부를 했는데 운 좋게 합격하게 됐습니다.”
외환위기 극복한 ‘미스터 원’
대화를 이어가던 중 광어회를 비롯해 각종 채소와 김, 흰 쌀밥이 차례로 식탁에 올랐다. 광어회와 흰 쌀밥의 조합은 생소했다. 김 회장이 먹는 방법을 알려줬다. “김에다 광어회와 각종 채소, 그리고 밥을 조금 올려서 쌈처럼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인터뷰는 천천히 하고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김 회장의 권유로 한 점을 맛봤다. 김에 싼 채소와 쌀밥에 광어회가 한데 어울린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김 회장은 재무부로 배치된 뒤 근무지가 뚝섬으로 결정돼 당황했다고 했다. 뚝섬에 국세심판소(현 조세심판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무부를 가라고 해서 광화문에서 일하는 줄 알았죠. 당시 뚝섬은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하는 곳이었어요.”
그는 묵묵히 견뎠다. 뚝섬에서 1년 반을 일한 뒤 본부로 복귀해 국제금융국으로 배치받았다. 그때 김 회장은 지금까지 평생의 멘토가 되는 사람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국제금융국장이던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이다. “업무에 철저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분입니다. 많이 배웠죠. 보고서 한 장을 쓰더라도 고민이 담겨 있지 않으면 통과되지 못하고 엄청 혼났죠. 보고할 때도 충분히 공부해서 완전히 소화해야 했습니다.”
김 회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실 금융 담당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할 당시 외환위기가 터졌다. 1997년 11월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자금 지원을 위해 긴박한 협상을 벌이던 현장의 중심에 있었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날짜까지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해 외환위기를 다룬 한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정부가 의도적으로 IMF 지원을 받았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김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통상 IMF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려면 협상을 한 달 정도 하는데 우리는 불과 닷새 만에 끝났습니다. 자금이 매일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막다른 골목이었죠. 당시 미국 정부도 단기 유동성 자금 지원만으로는 한국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재정경제부로 복귀한 뒤 국제금융심의관과 국제금융국장, 국제업무정책관을 잇따라 맡으며 외환시장을 안정시키는 등 국제금융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1999년 어느 날 제가 언론과 인터뷰하자마자 엔화가 급등하고 원화가 급락하는 일이 생겼죠. 그때 윌리엄 퍼섹이란 블룸버그 칼럼니스트가 저를 ‘미스터 원’이라고 칭하는 기사를 내보냈어요. 이후 제 인생의 별명은 ‘미스터 원’이 됐어요.”
‘미스터 원’은 ‘미스터 엔’에 빗댄 별칭이다. ‘미스터 엔’은 1990년대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일본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재무관(차관)을 가리킨다. “사카키바라 재무관은 물론 후임인 구로다 하루히코 재무관(현 일본은행 총재)과도 협의를 많이 했죠.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실무 책임자로서 5년을 근무했는데 그런 별칭도 얻게 돼 나름대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잇단 대출규제로 집값 안정시켜
마지막 식사로 채소비빔밥과 콩나물국이 나왔다. 한정식집은 약간 부담스러울 만큼 여러 반찬이 나오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적당히 먹을 만한 정도로만 밥과 반찬이 담겨 나온다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이른바 말년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관세청장 시절 인천공항의 통관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인천공항이 2005년 이후 공항서비스평가에서 계속 1위를 지키는 것도 김 회장의 덕을 많이 봤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김 회장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건설교통부 차관과 청와대 경제보좌관을 맡겼다. 이때 도입된 제도가 총부채상환비율(DTI)과 담보인정비율(LTV)이다.
김 회장은 2007년 8월 장관급인 금융감독위원장(현 금융위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노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선거에 나가라는 얘기 안 할 테니, 차기 대통령이 금융시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잘 관리해달라고 하시더군요.”
2008년 3월 금감위원장에서 물러난 김 회장은 10년 가까이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의를 했다. 이 기간 대학이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우수한 교수에게 주는 ‘석탑강의상’을 6차례나 받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2017년 11월 제53대 손보협회장으로 취임했다. 국제금융통인 김 회장이 취임 후 1년여간 바라본 국내 보험산업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는 국내 보험시장도 글로벌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보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해외 진출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협회도 해외 기관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손보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항상 해주던 얘기가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뀐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어입니다. 두 번째는 새로운 것이 익숙한 얼리어답터가 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통계입니다. 앞으로는 현상에 대한 분석은 정확한 통계에 기반해야 합니다.” ■손해보험협회는…
손해보험협회는 손해보험사의 권익 보호와 신장을 위해 1946년 설립된 사단법인이다. 보험산업 발전을 위한 각종 제도 개선 및 건의와 보험 관련 통계 및 분석, 해외 동향 분석, 소비자 보호 업무 등을 맡고 있다. 보험업법에 근거해 대리점의 등록서류 변경, 업무폐지 신고, 손보사 경영공시 등의 업무도 위임받아 수행한다. 조직은 기획관리본부, 자동차보험본부, 보험업무본부, 소비자서비스본부 등 4개 본부와 중부·동부·서부 등 3개 지역본부로 구성돼 있다. 국내 손보사 15곳을 정회원사로 두고 있다. 협회장 임기는 3년이다.
■약력
△1950년 전북 정읍 출생
△1969년 용산고 졸업
△1974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행정고시 합격(15회)
△1975년 재무부 사무관, 서기관
△1992년 재무부 국제금융국 과장
△1996년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1998년 재정경제부 국제금융심의관
△1999년 재경부 국제금융국장
△2001년 재경부 국제담당 차관보
△2003년 관세청장
△2005년 건설교통부 차관
△2006년 청와대 경제보좌관
△2007~2008년 금융감독위원장
△2009년 고려대 초빙교수
△2017년 11월~ 제53대 손해보험협회 회장 ■김용덕 회장의 단골집 목련나무집
담백한 비빔밥 일품…갤러리가 있는 한정식집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있는 목련나무집은 가진화랑 내 한정식집이다. 이름처럼 집 앞 뜰에 큰 목련나무가 있다. 2층 양옥집을 개조해 1층은 식당으로 운영하고, 2층에선 도자기와 각종 미술 작품을 전시한다. 이 때문에 가진화랑이라는 상호명을 함께 갖고 있다. 내부도 각종 고급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어 갤러리에서 식사를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음식점이지만 메뉴판이 따로 없다. 기본 메뉴는 비빔밥이다. 가격은 점심 때 1만5000원, 저녁 때는 1만7000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지만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재료가 정갈하게 차려져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반찬도 정해지지 않고 매일 주인이 반찬을 정해서 차려온다. 이 밖에 특별 주문을 하면 주인이 요리한 다양한 메뉴를 맛볼 수 있다. 주인과 미리 상의하면 원하는 음식을 주문할 수도 있다. 저녁 때는 최대 두 팀만 예약이 가능하다. 식사뿐 아니라 커피 등 간단한 음료도 마실 수 있다.
2006년 문을 연 이곳은 원래 청와대 인근에 있었으나, 2013년 이곳으로 옮겼다. 청와대 인근에 있을 때는 노무현 대통령도 이곳에서 비빔밥을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서정환/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공직에 입문해서도 김 회장의 행보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재무부에서 ‘요직’으로 불리던 이재국에선 한 번도 근무하지 못했다. 서기관 승진도 고시 후배보다 늦었다. 33년 공직생활의 절반 이상을 국제금융 파트에서 보냈다. 외환위기 직후엔 외환위기 극복에 온몸을 바쳐야만 했다. 관세청장을 지내면서 혁신을 이룬 것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눈에 띄어 금융감독위원장까지 올랐다.
김 회장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저보다 훌륭한 선후배가 많았음에도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건 행운입니다. 제 능력은 일부였을 뿐입니다. ‘운칠기삼’이 아니라 ‘운팔기이’라고나 할까요.”
결핵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생
김 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 효자동에 있는 한정식집인 목련나무집. 미술작품과 도자기 등을 전시하는 가진화랑 내 식당이다.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음식이 아주 정갈하고 담백해요. 어렸을 때 집에서 먹던 음식을 맛보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자리에 앉자마자 샐러드와 모둠전, 콩나물숙주볶음이 맛깔스럽게 차려져 나왔다. 김 회장의 설명대로 가정집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집에서 차린 듯했다.
김 회장은 술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고등학교 때 앓았던 결핵의 후유증 때문이다. “당시엔 결핵약을 한 줌씩 먹어야 했어요. 그렇다 보니 위와 십이지장에 무리가 왔죠. 공직 생활을 할 때도 술을 먹은 다음날엔 항상 고생하곤 했습니다.”
김 회장은 정읍에서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데다 세 살 때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등 어렸을 때 고생을 적잖게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상경한 이후에도 학비를 벌기 위해 과외 등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법조인을 꿈꿨지만 졸업 후 취직을 위해 경영대학을 선택했다. 취직을 원하던 그가 공직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궁금했다. “대학 4학년 때 군대 소집 영장이 나와서 상무대에 입소했습니다. 신검을 받는데 군의관들이 집으로 돌려보내더군요. 결핵 후유증 때문에 위와 십이지장이 안 좋고 밥도 잘 못 먹을 때였죠. 갑자기 시간이 남아 도서관에서 행시 공부를 했는데 운 좋게 합격하게 됐습니다.”
외환위기 극복한 ‘미스터 원’
대화를 이어가던 중 광어회를 비롯해 각종 채소와 김, 흰 쌀밥이 차례로 식탁에 올랐다. 광어회와 흰 쌀밥의 조합은 생소했다. 김 회장이 먹는 방법을 알려줬다. “김에다 광어회와 각종 채소, 그리고 밥을 조금 올려서 쌈처럼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인터뷰는 천천히 하고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김 회장의 권유로 한 점을 맛봤다. 김에 싼 채소와 쌀밥에 광어회가 한데 어울린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김 회장은 재무부로 배치된 뒤 근무지가 뚝섬으로 결정돼 당황했다고 했다. 뚝섬에 국세심판소(현 조세심판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무부를 가라고 해서 광화문에서 일하는 줄 알았죠. 당시 뚝섬은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하는 곳이었어요.”
그는 묵묵히 견뎠다. 뚝섬에서 1년 반을 일한 뒤 본부로 복귀해 국제금융국으로 배치받았다. 그때 김 회장은 지금까지 평생의 멘토가 되는 사람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국제금융국장이던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이다. “업무에 철저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분입니다. 많이 배웠죠. 보고서 한 장을 쓰더라도 고민이 담겨 있지 않으면 통과되지 못하고 엄청 혼났죠. 보고할 때도 충분히 공부해서 완전히 소화해야 했습니다.”
김 회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실 금융 담당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할 당시 외환위기가 터졌다. 1997년 11월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자금 지원을 위해 긴박한 협상을 벌이던 현장의 중심에 있었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날짜까지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해 외환위기를 다룬 한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정부가 의도적으로 IMF 지원을 받았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김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통상 IMF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려면 협상을 한 달 정도 하는데 우리는 불과 닷새 만에 끝났습니다. 자금이 매일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막다른 골목이었죠. 당시 미국 정부도 단기 유동성 자금 지원만으로는 한국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재정경제부로 복귀한 뒤 국제금융심의관과 국제금융국장, 국제업무정책관을 잇따라 맡으며 외환시장을 안정시키는 등 국제금융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1999년 어느 날 제가 언론과 인터뷰하자마자 엔화가 급등하고 원화가 급락하는 일이 생겼죠. 그때 윌리엄 퍼섹이란 블룸버그 칼럼니스트가 저를 ‘미스터 원’이라고 칭하는 기사를 내보냈어요. 이후 제 인생의 별명은 ‘미스터 원’이 됐어요.”
‘미스터 원’은 ‘미스터 엔’에 빗댄 별칭이다. ‘미스터 엔’은 1990년대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일본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재무관(차관)을 가리킨다. “사카키바라 재무관은 물론 후임인 구로다 하루히코 재무관(현 일본은행 총재)과도 협의를 많이 했죠.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실무 책임자로서 5년을 근무했는데 그런 별칭도 얻게 돼 나름대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잇단 대출규제로 집값 안정시켜
마지막 식사로 채소비빔밥과 콩나물국이 나왔다. 한정식집은 약간 부담스러울 만큼 여러 반찬이 나오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적당히 먹을 만한 정도로만 밥과 반찬이 담겨 나온다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이른바 말년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관세청장 시절 인천공항의 통관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인천공항이 2005년 이후 공항서비스평가에서 계속 1위를 지키는 것도 김 회장의 덕을 많이 봤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김 회장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건설교통부 차관과 청와대 경제보좌관을 맡겼다. 이때 도입된 제도가 총부채상환비율(DTI)과 담보인정비율(LTV)이다.
김 회장은 2007년 8월 장관급인 금융감독위원장(현 금융위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노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선거에 나가라는 얘기 안 할 테니, 차기 대통령이 금융시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잘 관리해달라고 하시더군요.”
2008년 3월 금감위원장에서 물러난 김 회장은 10년 가까이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의를 했다. 이 기간 대학이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우수한 교수에게 주는 ‘석탑강의상’을 6차례나 받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2017년 11월 제53대 손보협회장으로 취임했다. 국제금융통인 김 회장이 취임 후 1년여간 바라본 국내 보험산업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는 국내 보험시장도 글로벌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보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해외 진출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협회도 해외 기관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손보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항상 해주던 얘기가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뀐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어입니다. 두 번째는 새로운 것이 익숙한 얼리어답터가 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통계입니다. 앞으로는 현상에 대한 분석은 정확한 통계에 기반해야 합니다.” ■손해보험협회는…
손해보험협회는 손해보험사의 권익 보호와 신장을 위해 1946년 설립된 사단법인이다. 보험산업 발전을 위한 각종 제도 개선 및 건의와 보험 관련 통계 및 분석, 해외 동향 분석, 소비자 보호 업무 등을 맡고 있다. 보험업법에 근거해 대리점의 등록서류 변경, 업무폐지 신고, 손보사 경영공시 등의 업무도 위임받아 수행한다. 조직은 기획관리본부, 자동차보험본부, 보험업무본부, 소비자서비스본부 등 4개 본부와 중부·동부·서부 등 3개 지역본부로 구성돼 있다. 국내 손보사 15곳을 정회원사로 두고 있다. 협회장 임기는 3년이다.
■약력
△1950년 전북 정읍 출생
△1969년 용산고 졸업
△1974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행정고시 합격(15회)
△1975년 재무부 사무관, 서기관
△1992년 재무부 국제금융국 과장
△1996년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1998년 재정경제부 국제금융심의관
△1999년 재경부 국제금융국장
△2001년 재경부 국제담당 차관보
△2003년 관세청장
△2005년 건설교통부 차관
△2006년 청와대 경제보좌관
△2007~2008년 금융감독위원장
△2009년 고려대 초빙교수
△2017년 11월~ 제53대 손해보험협회 회장 ■김용덕 회장의 단골집 목련나무집
담백한 비빔밥 일품…갤러리가 있는 한정식집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있는 목련나무집은 가진화랑 내 한정식집이다. 이름처럼 집 앞 뜰에 큰 목련나무가 있다. 2층 양옥집을 개조해 1층은 식당으로 운영하고, 2층에선 도자기와 각종 미술 작품을 전시한다. 이 때문에 가진화랑이라는 상호명을 함께 갖고 있다. 내부도 각종 고급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어 갤러리에서 식사를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음식점이지만 메뉴판이 따로 없다. 기본 메뉴는 비빔밥이다. 가격은 점심 때 1만5000원, 저녁 때는 1만7000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지만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재료가 정갈하게 차려져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반찬도 정해지지 않고 매일 주인이 반찬을 정해서 차려온다. 이 밖에 특별 주문을 하면 주인이 요리한 다양한 메뉴를 맛볼 수 있다. 주인과 미리 상의하면 원하는 음식을 주문할 수도 있다. 저녁 때는 최대 두 팀만 예약이 가능하다. 식사뿐 아니라 커피 등 간단한 음료도 마실 수 있다.
2006년 문을 연 이곳은 원래 청와대 인근에 있었으나, 2013년 이곳으로 옮겼다. 청와대 인근에 있을 때는 노무현 대통령도 이곳에서 비빔밥을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서정환/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