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밀라노 화가 다니엘레 크레스피(1598~1630)의 ‘아벨을 죽이려는 악의에 가득 찬 카인’(1618년작, 유화, 184㎝×126㎝)
이탈리아 밀라노 화가 다니엘레 크레스피(1598~1630)의 ‘아벨을 죽이려는 악의에 가득 찬 카인’(1618년작, 유화, 184㎝×126㎝)
고대 인도인들은 명상과 수련을 통해 자신들이 도달해 안주해야 할 정신적인 도량(度量)을 다음 네 가지로 구분했다. 불교는 이 네 마음을 계승해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인간이 상상할 수도, 셀 수도 없는 경지의 네 가지 마음’으로 정리했다. 첫째는 사랑, 둘째는 연민, 셋째는 기쁨, 넷째는 평정심이다.

이 모든 덕목의 기준은 상대방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자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배려다. ‘연민’은 내가 타인의 불행을 보고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소극적인 단계를 넘어선다.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타인이 불행하지 않도록 헌신하는 노력이다. 세 번째 덕목인 ‘기쁨’은 사랑이나 연민보다 힘들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와 경쟁하던 상대방의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마지막 덕목인 ‘평정심’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삶의 일부로 기꺼이 수용하는 마음이다.

선의(善意)

이 네 가지 마음에서 가장 실천하기 힘든 마음가짐과 행동은 ‘기쁨’이다. 기쁨은 산스크리트어로 ‘무디타(mudita)’다. 무디타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숨겨져 있는 보화다. 무디타는 ‘섞다, 하나가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어 동사 ‘무드(mud)’의 추상명사형으로 나와 너, 나와 그, 심지어는 나와 원수가 하나가 되는 마음이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와 어머니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생존하지 못하는 취약한 동물이었다.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어머니는 갓난아이인 나의 건강을 위해 24시간, 일생을 헌신했다. 내가 웃으면 어머니도 웃고, 내가 아프면 어머니도 아프다. 어머니는 나의 첫걸음마를 올림픽 경기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기뻐했다. 어머니는 나와 혼연일체가 돼 내 삶의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수용해 그것 자체를 즐거워한다. 어머니라는 ‘최선’이 인간에게 부여한 ‘무디타’는 최고의 가치다.

악의(惡意)

악의는 상대방의 성공을 못마땅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가득찬 마음이다. 악의에 찬 인간은 인생의 기쁨을 자신 안에서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찾는다. 그런 사람은 양심의 거울을 응시한 적이 없어 자신을 돌보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 문명 이전의 야만인들은 자신의 배가 부르면 남의 음식을 빼앗지 않았다. 그러나 야만인보다 못한 악의와 시기로 가득한 현대인은 타인의 불행을 오히려 즐거워한다. 이런 악의에 찬 인간이 많은 사회는 희망이 없다. 개인이 자신을 넘어선 숭고한 삶을 지향하는 질서와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아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 연합군의 대장 메넬라오스가 무장한 군인들과 함께 무대에 등장한다. 무대에는 아이아스의 이복동생인 테우크로스와 합창대가 있다. 그들은 아이아스를 어떻게 매장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테우크로스에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어이, 자네! 이 시신에서 손을 떼게나. 나는 너에게 명령하는 거야! 그것을 일으켜 세우지 말게나!”(1147~1148행)

여태까지 합창대나 테우크로스는 아이아스를 ‘아네르(aner)’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해 불렀다. 아네르는 ‘영웅’이라는 의미다. 영웅은 자신보다 큰 가치를 위해 항상 수련하는 자다. 영웅은 현재의 그보다 클 사람이다. 그 고귀한 노력은 그에게 ‘명성(名聲)’을 선물한다. 명성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불후의 가치를 지닌다.

반면 메넬라오스는 아이아스를 그리스어로 ‘네크로스(nekros)’, 즉 ‘죽은 자’라고 부른다. 메넬라오스는 아이아스가 죽자, 그의 명성도 사라지기를 희망한다. 그는 자신의 말이 군사령관의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테우크로스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묻자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장황하게 제시한다.(1052~1090행)

두려움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민주주의는 토론문화였다. 자신이 숙고한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방의 이견을 경청해 최선의 방안을 찾는 토론은 민주주의의 꽃이다. 메넬라오스는 이 토론에서 아이아스를 ‘적’으로 규정한다. 아이아스는 자신을 포함한 전군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으며 아테나 여신의 개입으로 자신들 대신에 양 떼와 소 떼가 도축됐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아스가 그리스 연합군의 기강을 흔들었을 뿐 아니라,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매장이라는 장례 절차 대신 시신을 ‘황갈색 모래’ 위에 던져 해변에 사는 새들의 먹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넬라오스의 ‘악의’는 이 문장에 살아있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우리가 그를 조정할 수 없었지. 그러나 그가 지금은 죽었어. 자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이 우리는 그를 마음대로 할 거야!”(1067~1069행) 메넬라오스는 겁쟁이다. 그는 아이아스의 위세에 눌려 아무 일도 못했다. 그러나 아이아스가 죽으니, 이젠 그의 시신을 훼손할 참이다. 아이아스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이 이젠 추악한 악의로 변질됐다. 메넬라오스는 악의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근거를 도시와 도시를 지탱하는 법을 들먹거리며 설명한다.

메넬라오스는 고된 훈련과 엄격한 명령을 생명으로 하는 미케네 스파르타 군대의 대장이자 왕이다. 그는 “도시에는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군대에는 두려움과 존경심이 마지막 보루”라고 말한다. 그는 두려움을 이용해 부하들을 인솔하는 왕이다. 그는 테우크로스에게 다시 한 번 명령한다. “자네는 이 자를 묻지 말게나. 자네가 이들을 위해 무덤을 파면, 자네가 그 속으로 떨어질 거야.”

자진(自進)

아이아스는 메넬라오스의 명령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즉 아이아스는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자발적인 맹세 때문에 참전한 것이지, 메넬라오스의 왕명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아이아스는 자진(自進)해서 남의 지시를 받지 않고 항해해 참전했다. 아이아스는 스스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왔다. 미케네 군대를 이끌고 온 메넬라오스는 아이아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근거가 없다. 아이아스는 오랜 수련을 거쳐 동료들과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최고의 군인으로 추앙받은 ‘아리스토크라트(aristocrat)’이지만, 메넬라오스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뿐인 ‘전제군주’다.

메넬라오스는 테우크로스의 주장을 듣고 응수한다. “이 궁수(테우크로스)는 보아하니 자부심이 대단하군! 방패라도 갖고 있었다면 허풍이 대단하겠는데!”(1120~1122행)

‘궁수’에 대한 편견은 호메로스 시대부터 시작해 기원전 5세기까지 지속됐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군대의 전술은 ‘밀집 장창대형’이다. 그리스 군인들은 긴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을 이뤄 평원에서 싸웠다.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노예들이나 야만인들, 특히 페르시아 군대가 차용한 전투방식은 멀리서 ‘겁쟁이처럼’ 활을 발사했다. 메넬라오스는 궁수인 테우크로스를 폄하하면서 “이 궁수 좀 보쇼!”라고 말을 시작했다.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전투무기는 ‘방패’라고 자랑한다. 미케네 문명을 이어받은 스파르타 군인은 참전할 때 부인으로부터 방패를 전달받는 관습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구를 외우면서 방패를 남편에게 건넸다. “에이 탄 에이 에피 타스.” 이 그리스어 문구를 번역하자면, “이것(방패)과 같이 오든지, 아니면 이것에 실려 오십시오!”

시기와 질투 가득찬 인간…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기쁨 찾아
테우크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투표하고 개표하는 과정에 메넬라오스가 부정하게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메넬라오스가 개표를 조작해 아이아스에게 갈 무구를 오디세우스에게 돌아가도록 속였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악의에 찬 메넬라오스의 오만을 고발한다. “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어떤 사내(메넬라오스)가 이웃들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것을 보았지. 이봐요, 죽은 사람들에게 못된 짓일랑 하지 마시오. 그러다 후회합니다.”(1150~1155행)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