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 멕시코 접경지역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의회가 승인한 장벽 건설 예산(13억7500만달러)이 백악관이 요구한 57억달러에 못 미치자 헌법상의 대통령 고유 권한을 동원한 것이다. 민주당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미 정국이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양측의 정면 충돌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등은 미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말한 뒤 국가비상사태 선포문에 서명했다. 이 문서는 곧바로 상·하원에 전달됐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승인 없이 국방부 예산 등을 국경장벽 건설 비용으로 쓸 수 있게 됐다.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이지만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어 의회가 표결로 국가비상사태를 막기는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가 승인한 13억7500만달러 외에 군 건설사업 예산 36억달러, 마약단속 예산 25억달러, 재무부의 자산몰수기금 6억달러 등 80억달러가량을 국경장벽 예산에 투입할 수 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은 3140여㎞ 길이로 이 중 약 1040㎞엔 장벽이 설치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장벽 예산으로 빈 구간을 메우거나 기존의 펜스 장벽을 콘크리트 재질로 바꿀 계획이다. 80억달러를 투입하면 대략 320마일(약 512㎞)에 걸쳐 장벽을 쌓아올릴 수 있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과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국가비상사태 선포 뒤 성명을 내고 “대통령의 행위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에 부여한 의회의 배타적인 돈지갑(예산) 권한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며 ‘전방위 투쟁’을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은 2020년 대선을 앞둔 승부수로 분석되고 있다. 지지층을 붙잡아 두기 위한 카드로 장벽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NBC방송의 지난달 여론조사를 보면 국경장벽을 둘러싼 여론은 반대가 52%로 찬성(45%)보다 많지만 트럼프 지지층만 보면 찬성이 96%로 압도적이다.

정국 반전을 위한 노림수라는 지적도 나온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의 내통 의혹을 수사해온 로버트 뮬러 특검은 이날 폴 매너포트 전 트럼프 캠프 선거대책본부장에게 최대 24년의 징역형을 구형해야 한다는 의견을 법원에 제시했다. 국가비상사태는 이런 문제를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헌 소송 부담을 안고 있다. 미국 헌법은 “국고는 법률이 정한 지출 승인 절차에 따라서만 지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서다. CNN은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중대한 헌법 위반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소송이 제기돼도 대법원에서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미국의 국가비상사태는 거의 대부분 대외 문제에서 비롯됐다. WSJ에 따르면 1976년 국가비상사태법 제정 후 이뤄진 52건의 국가비상사태 중 국내 문제는 이번까지 네 번뿐이었다. 그나마 국내 문제도 1993~1994년 대량파괴무기(WMD) 억제, 2009년 신종플루(H1N1) 대응처럼 초당적 이슈였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 법사위원회는 청문회를 열기로 하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가비상사태 관련 문서를 22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