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비계 사다리
말비계 사다리
서울에서 간판업을 하고 있는 박모씨는 올해 들어 작업 현장에서 사다리 사용이 전면 금지됐다는 소식에 분통을 터트렸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취지는 이해하지만 준비·계도 기간도 없이 곧바로 시행되면서 혼란만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정부가 발판이 달린 작업대로 전부 교체하라고 하는데 개당 가격만 50만~100만원에 달한다”며 “아무런 지원책도 없이 멀쩡하게 잘 써오던 사다리를 갑자기 금지하면 현장에서 어떡하라는 것이냐”고 답답해했다.

“추위 풀리는 3월부터 대혼란 불보듯”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은 올해 1월1일부터 공사·작업용도로 사다리를 쓰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사다리를 타고 아래위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위에 올라가 작업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이다. 고용부는 그동안 사다리를 이용해 2인1조로 작업을 허용했던 사다리안전보건지침도 폐기했다.

A자형 사다리
A자형 사다리
사용이 금지된 품목은 고정식·일자형·A형·H형·접이식 등 사실상 모든 사다리다. 건설·전기배선·간판·건물관리(청소 및 수목 전지작업) 등 다방면에서 사다리를 작업대로 활용해 온 만큼 파장은 만만치 않다. 이를 어기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정부는 노동자의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실제 최근 10년간 사다리 위에서 일하다가 떨어져 다친 경우는 3만8859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1만7739명(71%)이 중상해를 입었고 371명이 사망했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정책이지만 현장 분위기는 오히려 싸늘하다. 부산의 한 건물청소업체 관계자는 “한 번도 현장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발상”이라며 “추위가 풀리고 작업이 늘어나는 3월부터 곳곳에서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비판했다. 작업 공간이 넓고 대체 장비가 마련돼 있는 대규모 건설 현장이라면 몰라도 사실상 마땅한 대안이 없는 중소 현장에서는 법을 어기는 사례가 속출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안 없는 금지는 곤란

정부는 작업자가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설치된 말비계·틀비계 등을 사용하면 된다고 하지만 역시 반응은 부정적이다. 사다리를 주로 쓰는 현장은 말비계가 들어가지 않는 좁은 곳이 많다. 말비계는 높이가 고정돼 있어 작업을 하기도 쉽지 않다. 20년째 전기설비 일을 하는 최모씨는 “건설 현장은 작업 위치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높이 조절은 필수”라며 “현장에서 자리를 옮길 때마다 일일이 조립, 해체해야 하는 말비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비용 문제도 영세업자들의 발목을 잡는다. 비계를 쓸 땐 2~3명의 인원이 필요한 데 이들의 하루 단가는 약 22만원. 비계당 70만원의 노임이 추가되는 셈이다. 결국 사업원가 상승과 공사 기간 연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 중소 건설업체 관계자는 “과거 공사를 수주할 때 사다리를 작업대로 쓰는 것을 기준으로 입찰했는데 갑자기 사다리가 금지되면서 추가비용이 생기고, 공기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단기적으로 영세업체에 대해 재정 지원을 하고 사다리 대신 쓸 수 있는 실용적이고 안전한 장비를 개발·보급하는 데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재난안전협회 관계자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사다리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하고 혼자서도 작업할 수 있는 무동력 리프트로 대체되는 추세”라며 “정부가 일방적으로 금지·단속만 할 게 아니라 정책 취지를 달성할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