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건축사의 使命을 모르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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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짓는가" 철학이 빠진 우리 건축법 1조
건축사법에도 '자격' 규정뿐 '가치'는 실종
'문화를 표현하는' 건축사 역할 인정해야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건축사법에도 '자격' 규정뿐 '가치'는 실종
'문화를 표현하는' 건축사 역할 인정해야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1962년 제정된 한국 건축법 제1조는 ‘본법은 건축물의 대지, 구조, 설비의 기준 및 용도에 관하여 규정함으로써 공공복리의 증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었다. 건축법은 2016년까지 98번, 시행령은 169번 개정됐는데 1992년에 건물의 ‘안전·기능 및 미관’ 그리고 2005년에 ‘환경’ 총 네 단어가 추가됐을 뿐 제1조 규정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 건축법 제1조는 이렇게 돼 있다. ‘이 법은 건축물의 대지·구조·설비 기준 및 용도 등을 정하여 건축물의 안전·기능·환경 및 미관을 향상시킴으로써 공공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법의 제1조는 그렇게 주목해서 읽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물의 궁극적인 목적은 안전, 건강, 효율, 쾌적함이 아니다. 2005년 삽입된 ‘환경’은 지나치게 범위가 넓고, ‘아름다운 경관’을 뜻하는 ‘미관’도 모호한 단어다. ‘공공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도 그렇다. 거의 모든 법에 다 들어가는 말이므로 이것이 건축물과 사회의 특별한 관계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건축법령 체계의 개편 방향을 정하겠다는 2015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연구보고서조차 ‘건축물이 실현되는 궁극적 목적은 안전, 건강, 효율, 쾌적 등의 성능이 유지되는 공간의 확보에 있다’고 제1조 규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좋은 건축물은 대지, 구조, 설비, 용도, 안전, 기능, 환경, 미관의 여러 조건을 잘 합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런 조건은 모두 건축물을 만드는 수단이다. 원자에너지의 막대한 힘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미세한 전류의 흐름이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저장하고 가공한다. 이런 모든 것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건축은 다르다. 인간의 생활, 문화, 생산과 전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축은 살아가는 목적 자체이며 살아가는 방식을 짓는 것이다.
프랑스 건축법은 ‘건축은 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생활습관 같은 문화의 바탕이 되도록 건물을 세우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두 나라의 건축법은 시작이 다르다. 프랑스는 첫머리부터 아주 짧은 문장으로 건축이 삶의 목적임을 밝히고 건축물을 왜 세워야 하는지 가치를 묻고 있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가장 오래된 건축서를 통해 건축의 세 가지 조건은 ‘용(用·utilitas)’ ‘강(强·firmitas)’ ‘미(美·venustas)’라고 봤다. 이는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건축의 세 가지 조건이다. 그런데 우리 건축법 제1조를 뜯어보면 이 세 가지 조건 중 ‘용’과 ‘강’만 중요시한다.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만 중요하고 왜 세우는가에는 인식이 전혀 없다. 비트루비우스의 ‘venustas’를 ‘미’라고 번역해서 그렇지, 실은 사회와 문화의 가치를 넓게 아우르는 개념이다. ‘문화를 표현한다’는 것도 건축물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예술적 표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호사와 건축사는 직능인(professional)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로 돼 있다. 사명을 앞세운다. 그런데 건축사법 제1조는 ‘건축사의 자격과 그 업무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건축사가 되려면 이런 자격을 갖추고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을 신중하게 다뤄야 할 건축사에게 목적물을 잘 설계하라는 임무만 강조하는 건축사법 제1조는 건축법 제1조와 내용적으로 일치한다. 이처럼 이 사회는 건축사의 사명을 모른다.
건축법 제1조에 따르면 건축사의 설계 대가(代價)는 비트루비우스의 세 가지 조건 중 ‘용’과 ‘강’에 대해 주는 것이지, ‘미’에 대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설계 대가는 대지, 구조, 설비, 용도, 안전, 기능, 환경, 미관을 항목대로 잘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엄밀하게 왜 세우는가, 삶의 자리는 어떠해야 하는가는 역설적이게도 설계 대가와 무관하게 건축사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학 건축학과에서는 ‘건축물은 왜 세우는가’에 대한 과목을 많이도 가르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건축법 제1조대로 건축을 바라보는 한 현실과 사고의 격차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사실 법의 제1조는 그렇게 주목해서 읽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물의 궁극적인 목적은 안전, 건강, 효율, 쾌적함이 아니다. 2005년 삽입된 ‘환경’은 지나치게 범위가 넓고, ‘아름다운 경관’을 뜻하는 ‘미관’도 모호한 단어다. ‘공공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도 그렇다. 거의 모든 법에 다 들어가는 말이므로 이것이 건축물과 사회의 특별한 관계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건축법령 체계의 개편 방향을 정하겠다는 2015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연구보고서조차 ‘건축물이 실현되는 궁극적 목적은 안전, 건강, 효율, 쾌적 등의 성능이 유지되는 공간의 확보에 있다’고 제1조 규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좋은 건축물은 대지, 구조, 설비, 용도, 안전, 기능, 환경, 미관의 여러 조건을 잘 합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런 조건은 모두 건축물을 만드는 수단이다. 원자에너지의 막대한 힘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미세한 전류의 흐름이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저장하고 가공한다. 이런 모든 것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건축은 다르다. 인간의 생활, 문화, 생산과 전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축은 살아가는 목적 자체이며 살아가는 방식을 짓는 것이다.
프랑스 건축법은 ‘건축은 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생활습관 같은 문화의 바탕이 되도록 건물을 세우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두 나라의 건축법은 시작이 다르다. 프랑스는 첫머리부터 아주 짧은 문장으로 건축이 삶의 목적임을 밝히고 건축물을 왜 세워야 하는지 가치를 묻고 있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가장 오래된 건축서를 통해 건축의 세 가지 조건은 ‘용(用·utilitas)’ ‘강(强·firmitas)’ ‘미(美·venustas)’라고 봤다. 이는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건축의 세 가지 조건이다. 그런데 우리 건축법 제1조를 뜯어보면 이 세 가지 조건 중 ‘용’과 ‘강’만 중요시한다.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만 중요하고 왜 세우는가에는 인식이 전혀 없다. 비트루비우스의 ‘venustas’를 ‘미’라고 번역해서 그렇지, 실은 사회와 문화의 가치를 넓게 아우르는 개념이다. ‘문화를 표현한다’는 것도 건축물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예술적 표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호사와 건축사는 직능인(professional)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로 돼 있다. 사명을 앞세운다. 그런데 건축사법 제1조는 ‘건축사의 자격과 그 업무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건축사가 되려면 이런 자격을 갖추고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을 신중하게 다뤄야 할 건축사에게 목적물을 잘 설계하라는 임무만 강조하는 건축사법 제1조는 건축법 제1조와 내용적으로 일치한다. 이처럼 이 사회는 건축사의 사명을 모른다.
건축법 제1조에 따르면 건축사의 설계 대가(代價)는 비트루비우스의 세 가지 조건 중 ‘용’과 ‘강’에 대해 주는 것이지, ‘미’에 대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설계 대가는 대지, 구조, 설비, 용도, 안전, 기능, 환경, 미관을 항목대로 잘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엄밀하게 왜 세우는가, 삶의 자리는 어떠해야 하는가는 역설적이게도 설계 대가와 무관하게 건축사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학 건축학과에서는 ‘건축물은 왜 세우는가’에 대한 과목을 많이도 가르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건축법 제1조대로 건축을 바라보는 한 현실과 사고의 격차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