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속 3·1 운동] ⑪ 獨·伊언론 '짤막' 보도…'내코가 석자'·日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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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1차세계대전 패전 후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등 국내 혼란기
'제국 열강' 이탈리아는 日과 특수관계…1차대전 종전후 비밀협정 체결 ※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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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전후 맥락의 파악이 어려운 두 줄짜리 '자투리' 기사, 이탈리아에서는 3·1 운동으로 인한 일본의 통치 정책변화 발표를 '받아쓰기'한 기사 정도가 현재까지 발견된 보도 내용이다.
유럽의 주요국으로 언론이 발달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3·1 운동에 대한 작은 팩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셈이었다.
명확한 인과관계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었고, 이탈리아는 당시 일본과 특수관계였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는 3·1 운동과 관련해선 당시 수도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기사가 최근 발견됐다.
"한국의 소요사태는 진압됐다.
그곳은 다시 평온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제목도 없는 단 두 줄짜리 기사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21일이 지난 후인 1919년 3월 22일자에 보도됐다.
그
것도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런던특파원이 3월 9일자 도쿄발 로이터 통신을 인용한 기사였다.
당일 총 6면의 신문 지면 중 이 기사는 정치 섹션의 마지막인 3면 하단에 몇 개의 단신과 함께 섞여 있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대(University Wuerzburg) 중국학과의 고혜련 초빙교수(Prof. Heyryun KOH)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시 독일의 주요 언론 보도를 조사했지만, 3·1 운동에 관한 기사는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두 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독립기념관의 용역을 받아 당시 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서 발행된 10여개의 신문에서 개항기와 일제시대 등을 배경으로 한국 관련 기사를 조사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 독립운동 상황에 대해 사실을 주로 전달해왔다.
헤이그 특사 3인의 활동과 고종의 퇴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등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의병 활동에 대한 기사도 나오고 한일합병 이후 언론탄압이 시작됐다는 보도도 이뤄졌다.
을사늑약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선이 담기기도 했다.
더구나 독일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이던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 지역 진출을 노렸고, 한국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결국, 독일은 1897년 칭다오가 포함된 산둥반도의 자오저우완 일대를 점령하고 함대 기지를 칭다오에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자오저우완 일대를 일본에 빼앗겼다.
일본에 대한 독일 측의 감정이 고울 리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3·1 운동 당시 독일은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처지였다.
그해 1월 독일 사회주의 혁명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일어났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당하고 베를린 운하에서 시체가 발견된 후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됐다.
고 교수는 "당시 독일 신문의 내용을 보면 국내 문제 보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외신의 비중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선 밀라노에서 발행되는 주요 신문이었던 '코리에레델라세라'에서 3·1 운동 관련 내용이 등장했다.
3·1 운동이 발생한 지 6개월 가까이 지난 8월 23일 코리에레델라세라 지면에서다.
런던발로 실린 이 기사는 "도쿄에서 일본 왕이 발행한 교서에 따르면, 한국에 '자치'(Home Rule)이라는 개혁안의 혜택을 주는 자치를 부여한다.
민간인 총독이 군사 총독을 대체할 것이며, 민간 경찰이 헌병을 대체할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에 자치권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다.
3·1운동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3·1 운동을 계기로 군대와 헌병에 의한 무단 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가 정책을 변화했다고 알린 셈이다.
여기에 '개혁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과 이에 대항한 한국민들의 처절한 외침에는 고개를 돌린 채 일본 측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한 셈이다. 이탈리아 언론의 이런 태도는 당시 국내외 상황과 맞물린다.
이탈리아 역시 제국주의 열강 중의 하나였다.
아프리카의 리비아, 에리트레아 등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피식민지인 한국이 일본에 저항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사건을 예의주시할 수 있지만,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저항한 거대한 물결이었던 3·1운동을 공개적으로 보도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이탈리아는 1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과 특수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탈리아는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일본이 비밀협정을 체결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일본은 당시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물밑 외교전을 펼쳤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 앞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3국 동맹을 체결했으나 전쟁 초기에 중립을 선포했다가, 1915년에 연합국에 가담해 승전국의 일원이 됐다.
/연합뉴스
'제국 열강' 이탈리아는 日과 특수관계…1차대전 종전후 비밀협정 체결 ※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관련기사>
[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http://www.yna.co.kr/view/AKR20190207090000009?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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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전후 맥락의 파악이 어려운 두 줄짜리 '자투리' 기사, 이탈리아에서는 3·1 운동으로 인한 일본의 통치 정책변화 발표를 '받아쓰기'한 기사 정도가 현재까지 발견된 보도 내용이다.
유럽의 주요국으로 언론이 발달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3·1 운동에 대한 작은 팩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셈이었다.
명확한 인과관계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었고, 이탈리아는 당시 일본과 특수관계였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는 3·1 운동과 관련해선 당시 수도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기사가 최근 발견됐다.
"한국의 소요사태는 진압됐다.
그곳은 다시 평온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제목도 없는 단 두 줄짜리 기사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21일이 지난 후인 1919년 3월 22일자에 보도됐다.
그
것도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런던특파원이 3월 9일자 도쿄발 로이터 통신을 인용한 기사였다.
당일 총 6면의 신문 지면 중 이 기사는 정치 섹션의 마지막인 3면 하단에 몇 개의 단신과 함께 섞여 있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대(University Wuerzburg) 중국학과의 고혜련 초빙교수(Prof. Heyryun KOH)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시 독일의 주요 언론 보도를 조사했지만, 3·1 운동에 관한 기사는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두 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독립기념관의 용역을 받아 당시 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서 발행된 10여개의 신문에서 개항기와 일제시대 등을 배경으로 한국 관련 기사를 조사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 독립운동 상황에 대해 사실을 주로 전달해왔다.
헤이그 특사 3인의 활동과 고종의 퇴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등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의병 활동에 대한 기사도 나오고 한일합병 이후 언론탄압이 시작됐다는 보도도 이뤄졌다.
을사늑약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선이 담기기도 했다.
더구나 독일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이던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 지역 진출을 노렸고, 한국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결국, 독일은 1897년 칭다오가 포함된 산둥반도의 자오저우완 일대를 점령하고 함대 기지를 칭다오에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자오저우완 일대를 일본에 빼앗겼다.
일본에 대한 독일 측의 감정이 고울 리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3·1 운동 당시 독일은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처지였다.
그해 1월 독일 사회주의 혁명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일어났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당하고 베를린 운하에서 시체가 발견된 후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됐다.
고 교수는 "당시 독일 신문의 내용을 보면 국내 문제 보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외신의 비중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선 밀라노에서 발행되는 주요 신문이었던 '코리에레델라세라'에서 3·1 운동 관련 내용이 등장했다.
3·1 운동이 발생한 지 6개월 가까이 지난 8월 23일 코리에레델라세라 지면에서다.
런던발로 실린 이 기사는 "도쿄에서 일본 왕이 발행한 교서에 따르면, 한국에 '자치'(Home Rule)이라는 개혁안의 혜택을 주는 자치를 부여한다.
민간인 총독이 군사 총독을 대체할 것이며, 민간 경찰이 헌병을 대체할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에 자치권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다.
3·1운동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3·1 운동을 계기로 군대와 헌병에 의한 무단 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가 정책을 변화했다고 알린 셈이다.
여기에 '개혁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과 이에 대항한 한국민들의 처절한 외침에는 고개를 돌린 채 일본 측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한 셈이다. 이탈리아 언론의 이런 태도는 당시 국내외 상황과 맞물린다.
이탈리아 역시 제국주의 열강 중의 하나였다.
아프리카의 리비아, 에리트레아 등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피식민지인 한국이 일본에 저항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사건을 예의주시할 수 있지만,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저항한 거대한 물결이었던 3·1운동을 공개적으로 보도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이탈리아는 1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과 특수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탈리아는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일본이 비밀협정을 체결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일본은 당시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물밑 외교전을 펼쳤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 앞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3국 동맹을 체결했으나 전쟁 초기에 중립을 선포했다가, 1915년에 연합국에 가담해 승전국의 일원이 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