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화원, '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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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유리건판 사진 154장, 문서 14건 속 경주
동아일보 (1920~1940년)의 298건 기사와 각종 희귀사진들 경주문화원(원장 김윤근)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치하 경주사회와 경주민의 역정을 총망라한 뜻깊은 책을 22일 발간했다.
경주시 지원사업으로 발간된 이번 책에는 그간 경주에 소개되지 않았던 수백 장의 사진들이 소개됐다. 당대 경주사회의 흐름과 경주민의 고단했던 삶의 역정을 낱낱이 증언하는 수백 건의 신문기사(동아일보(1920~1940년) 기준)와 각종 자료가 실려 선대 경주민의 삶과 경주사회를 생생하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다.
책에는 서장인‘가히 살만한 땅이로다’에서부터 종장인‘역사는 우리와 더불어’까지 모두 11개장에 45편의 소제목으로 나눠 일제치하 경주에서 일어났던 거의 사안들을 정리·분류해 의미와 의의를 전개시켰다. 부록으로 조선시대의「경주읍내전도」(1798년)와 일제의「경주읍내시가약지도」(1931년)를 담아 시대흐름에 따른 경주시가지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서구열강과 일본·중국의 정세 속 조선과 경주를 비교시킨「경주중심으로 보는 연표」,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검거된 사람들의 심문내용까지 실어서 독립을 바랐던 우리 선조의 간절하고 굳센 의지를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저자 최부식 경주문화원 이사는 “경주는 신라이고, 신라는 경주입니다”라며 "천년왕국 신라가 남긴 대다수의 유적유물이 경주에 있고, 국민과 경주시민의 자부심이지만, 신라를 이은 고려 조선은 물론 현 경주의 모습으로 빚어진 일제치하의 경주에 대한 자료와 연구는 상대적으로 매우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그는 일제강점기를 살펴야 현재의 경주에서 신라까지 볼 수 있으며, 경주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요지로, 저술방향을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일제치하의 경주는 오늘과 가장 가까운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전반의 경주시가지와 경주민의 일상적 삶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 태부족하고, 증언해줄 선대인들이 떠나고 살아계신 분들도 연로해 기억도 희미하다’면서 집필의 동기와 어려움을 토로했다.저자는 그 어려움 속에서 새로 발굴한 수많은 사진들과 신문기사들을 통해 일제치하 경주와 당대 진실에 한 걸음 더 생생하게 접근했다.
일제치하 경주에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일제의 지배에 경주민은 그저 복종, 순응, 묵시적 동의를 하면서 살았을까. 결코 아니었다. 경주민들은 대한제국 말엽부터 의병항쟁을 통해 일제침략에 맞섰다. 일제치하에 들어가면서 최 부잣집의 형제들은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펴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고, 다양한 방법으로 경주사회에 힘을 보탰다. 3·1독립만세 거사를 앞두고 경주의 천도교들은 특별수련회에 들어갔다.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경주민들은 활발한 만세운동으로 저항했다.
일제가 미곡증산을 통한 수탈에 나서기 위해 수리조합 설립에 나서자 수백 명의 안강민들은 시위를 펴면서 동척과 일본인 지주들에 맞섰다.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분노한 어린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서고, 청년들은 각종 야학운동을 펼치며 경주민의 자각을 촉구하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 누구도 듣도 보도 못한 금관이 등장하자 경주민들은 금관이 경주에서 떠나가지 않게 반대운동을 펼쳤고, 금관고를 지었다.
일제의 첫‘신라제’개최의도를 간파한 청년들이 축등을 파손시키자 일제는‘적색비사사건’이라면서 경주 감포 포항 울산에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키는 철저한 압정을 시행했다. 일본지주의 횡포에 경주민이 검거되자 경주민들은 경주경찰서를 포위해 석방을 외쳤다.
경주민들은 일제의 폭압에 항의하고, 진정서를 내면서 집단적인 저항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주는 물론 조선인들은 광복이 될 때까지 항일투쟁을 펼쳤다. 그럼에도 일제는 중국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징용징병, 근로정신대, 위안부를 끌고 갔다. 전쟁의 광기 속에 수많은 경주민들은 만주 등지로 떠나가고, 일제는 온갖 물자를 수탈했다. 신문기사는 경주에서 벌어진 그들의 만행들을 고발·증언하고 있다.
일제와 일본인은 식민지 경주시가지 주요 지점을 차지하고 상권을 확보했다. 시가지 재정비를 하면서 우리의 선대인들이 집단으로 기억하는 조선을 지우고 그들의 도시로 만들어갔다. 그들의 시각은 분명했다. 날조한 ‘신라정벌’,‘동조동근론’을 내세워 신라 왕릉들을 ‘발굴’이라는 미명 아래 마구 파헤쳤다. 경주고적보존회,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설립을 통해 그들의 문명성, 지배의 당위성을 과시했다. 근대문명 자동차·기차 진입으로 유적지 파괴, 경주시가지에 변화가 일어났다. 서천 철교에서 기차가 추락하고 자동차가 뒤집는 사건사고가 빈발했다.
관광지로 변모하기 시작한 경주에는 유흥분위기도 일어나면서 경주사회에 심각한 폐해가 발생했다. 동력선과 근대어구로 무장한 일본어민은 감포를 비롯한 동해 바다를 그들의 만찬장으로 만들었다. 태풍으로 수백 척의 어선과 어민들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는가 하면, 지독한 가뭄에 경주사회와 경주민들은 물가 앙등, 흉년에 시달려 눈물로 호소를 했다.
일제는 점령지 경주와 경주민들에게 압제와 수탈을 강요해 우리의 선대인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시대를 견뎌야만 했다. 그들의 압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경주민들은 교육, 문화예술, 체육, 종교, 경제생활을 엮으면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일본인들과 섞여 살 수밖에 없었다.이책은 당대 경주사회 흐름을 낱낱이 밝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그 시대를 산 선대 경주민의 모습을 눈앞에 펼쳐 보였다.
김윤근 경주문화원장은 “이 책은 일제를 통한 근대기 경주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것"이라며 " 그 내용들은 바로 우리 어머니·아버지, 그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그 이야기는 곧 우리 경주의 역사로, 내일의 경주를 위해 많은 시민들이 책을 서로 돌려보면서라도 꼭 읽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문화원은 23일 오후 2시, 문화원강당에서 ‘정기총회’에 앞서 출판기념회를 열어 저서 헌증과 작가격려, 축하 행사를 갖는다.
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
동아일보 (1920~1940년)의 298건 기사와 각종 희귀사진들 경주문화원(원장 김윤근)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치하 경주사회와 경주민의 역정을 총망라한 뜻깊은 책을 22일 발간했다.
경주시 지원사업으로 발간된 이번 책에는 그간 경주에 소개되지 않았던 수백 장의 사진들이 소개됐다. 당대 경주사회의 흐름과 경주민의 고단했던 삶의 역정을 낱낱이 증언하는 수백 건의 신문기사(동아일보(1920~1940년) 기준)와 각종 자료가 실려 선대 경주민의 삶과 경주사회를 생생하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다.
책에는 서장인‘가히 살만한 땅이로다’에서부터 종장인‘역사는 우리와 더불어’까지 모두 11개장에 45편의 소제목으로 나눠 일제치하 경주에서 일어났던 거의 사안들을 정리·분류해 의미와 의의를 전개시켰다. 부록으로 조선시대의「경주읍내전도」(1798년)와 일제의「경주읍내시가약지도」(1931년)를 담아 시대흐름에 따른 경주시가지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서구열강과 일본·중국의 정세 속 조선과 경주를 비교시킨「경주중심으로 보는 연표」,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검거된 사람들의 심문내용까지 실어서 독립을 바랐던 우리 선조의 간절하고 굳센 의지를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저자 최부식 경주문화원 이사는 “경주는 신라이고, 신라는 경주입니다”라며 "천년왕국 신라가 남긴 대다수의 유적유물이 경주에 있고, 국민과 경주시민의 자부심이지만, 신라를 이은 고려 조선은 물론 현 경주의 모습으로 빚어진 일제치하의 경주에 대한 자료와 연구는 상대적으로 매우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그는 일제강점기를 살펴야 현재의 경주에서 신라까지 볼 수 있으며, 경주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요지로, 저술방향을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일제치하의 경주는 오늘과 가장 가까운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전반의 경주시가지와 경주민의 일상적 삶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 태부족하고, 증언해줄 선대인들이 떠나고 살아계신 분들도 연로해 기억도 희미하다’면서 집필의 동기와 어려움을 토로했다.저자는 그 어려움 속에서 새로 발굴한 수많은 사진들과 신문기사들을 통해 일제치하 경주와 당대 진실에 한 걸음 더 생생하게 접근했다.
일제치하 경주에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일제의 지배에 경주민은 그저 복종, 순응, 묵시적 동의를 하면서 살았을까. 결코 아니었다. 경주민들은 대한제국 말엽부터 의병항쟁을 통해 일제침략에 맞섰다. 일제치하에 들어가면서 최 부잣집의 형제들은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펴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고, 다양한 방법으로 경주사회에 힘을 보탰다. 3·1독립만세 거사를 앞두고 경주의 천도교들은 특별수련회에 들어갔다.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경주민들은 활발한 만세운동으로 저항했다.
일제가 미곡증산을 통한 수탈에 나서기 위해 수리조합 설립에 나서자 수백 명의 안강민들은 시위를 펴면서 동척과 일본인 지주들에 맞섰다.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분노한 어린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서고, 청년들은 각종 야학운동을 펼치며 경주민의 자각을 촉구하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 누구도 듣도 보도 못한 금관이 등장하자 경주민들은 금관이 경주에서 떠나가지 않게 반대운동을 펼쳤고, 금관고를 지었다.
일제의 첫‘신라제’개최의도를 간파한 청년들이 축등을 파손시키자 일제는‘적색비사사건’이라면서 경주 감포 포항 울산에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키는 철저한 압정을 시행했다. 일본지주의 횡포에 경주민이 검거되자 경주민들은 경주경찰서를 포위해 석방을 외쳤다.
경주민들은 일제의 폭압에 항의하고, 진정서를 내면서 집단적인 저항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주는 물론 조선인들은 광복이 될 때까지 항일투쟁을 펼쳤다. 그럼에도 일제는 중국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징용징병, 근로정신대, 위안부를 끌고 갔다. 전쟁의 광기 속에 수많은 경주민들은 만주 등지로 떠나가고, 일제는 온갖 물자를 수탈했다. 신문기사는 경주에서 벌어진 그들의 만행들을 고발·증언하고 있다.
일제와 일본인은 식민지 경주시가지 주요 지점을 차지하고 상권을 확보했다. 시가지 재정비를 하면서 우리의 선대인들이 집단으로 기억하는 조선을 지우고 그들의 도시로 만들어갔다. 그들의 시각은 분명했다. 날조한 ‘신라정벌’,‘동조동근론’을 내세워 신라 왕릉들을 ‘발굴’이라는 미명 아래 마구 파헤쳤다. 경주고적보존회,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설립을 통해 그들의 문명성, 지배의 당위성을 과시했다. 근대문명 자동차·기차 진입으로 유적지 파괴, 경주시가지에 변화가 일어났다. 서천 철교에서 기차가 추락하고 자동차가 뒤집는 사건사고가 빈발했다.
관광지로 변모하기 시작한 경주에는 유흥분위기도 일어나면서 경주사회에 심각한 폐해가 발생했다. 동력선과 근대어구로 무장한 일본어민은 감포를 비롯한 동해 바다를 그들의 만찬장으로 만들었다. 태풍으로 수백 척의 어선과 어민들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는가 하면, 지독한 가뭄에 경주사회와 경주민들은 물가 앙등, 흉년에 시달려 눈물로 호소를 했다.
일제는 점령지 경주와 경주민들에게 압제와 수탈을 강요해 우리의 선대인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시대를 견뎌야만 했다. 그들의 압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경주민들은 교육, 문화예술, 체육, 종교, 경제생활을 엮으면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일본인들과 섞여 살 수밖에 없었다.이책은 당대 경주사회 흐름을 낱낱이 밝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그 시대를 산 선대 경주민의 모습을 눈앞에 펼쳐 보였다.
김윤근 경주문화원장은 “이 책은 일제를 통한 근대기 경주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것"이라며 " 그 내용들은 바로 우리 어머니·아버지, 그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그 이야기는 곧 우리 경주의 역사로, 내일의 경주를 위해 많은 시민들이 책을 서로 돌려보면서라도 꼭 읽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문화원은 23일 오후 2시, 문화원강당에서 ‘정기총회’에 앞서 출판기념회를 열어 저서 헌증과 작가격려, 축하 행사를 갖는다.
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