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하노이선언’에 조건부 대북제재 완화가 담길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북한 개방을 전제로 “우리 주도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아예 전기공학 기술자인 오수용 노동당 경제부장(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노이 수행단에 포함했다. 제재 완화를 넘어 글로벌 대북 투자에 관한 ‘약속’을 받으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싱가포르 땐 없던 ‘경제통’ 오수용 등장

문 대통령의 이날 수석보좌관회의 발언은 ‘하노이 담판’의 핵심 쟁점이 무엇인지 가늠케 해준다. 문 대통령은 “핵 대신 경제발전을 선택해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며 “북한 경제가 개방된다면 주변 국가들과 국제기구, 국제자본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과 세 번의 정상회담을 열었다. 두 정상 간엔 ‘핫라인’도 연결돼 있다. 미·북 핵협상이 고비를 겪을 때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진의’를 백악관에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해왔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김정은이 미국 ‘기준치’에 맞는 비핵화 조치를 내놓고, 대가로 ‘경제발전’에 관한 상응조치를 선물로 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은이 오수용을 대동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오수용은 경제 분야만 계속 파온 사람이고, 북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이라며 “자신들이 원하는 건 제재 완화와 경제적 이익이라는 걸 분명히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수용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전자공업상, 내각부총리를 지냈다. 2015년엔 북한 의전서열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당 정치국 위원에 임명됐다.
北 경제총괄 대동한 김정은…'영변핵+α' 대가로 투자약속도 받아내나
조건부 제재 완화에 남·북·미 공감대

정황도 있고, 가능성도 커지고 있긴 하지만 ‘하노이선언’에 대북제재와 관련된 것이 담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가 하노이에서 치열하게 맞서고 있는 의제도 제재 완화와 관련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론이다. 미국은 북핵의 상징으로 불리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원샷’ 폐기와 ‘플러스알파’로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 신고 및 동결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건 대표는 지난달 31일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작년 10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김정은의 면담을 소개하며 “김 위원장이 영변 핵시설과 (영변 외) 플루토늄 및 우라늄 농축시설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날 비건 대표는 조건부 제재 완화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는 “완전한 비핵화까지 제재를 해제하지 않는 것은 맞다”면서도 “다만 ‘모든 것을 다 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여지를 남겼다.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 지난달 평양에서 55시간 실무협상을 벌인 ‘비건팀’에 미국법 전문가가 포함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대북제재 틀을 유지하면서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대북 지원 방법을 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법 전문가들은 작년 11월 구성된 한·미 워킹그룹 ‘멤버’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도 비건 대표의 방북 전 현물 지급 방식의 금강산 관광 재개 등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비건팀에 제안했다.

“기회 놓칠라” 대북투자 수요 급증

제재 우회로가 열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대북 투자의 문을 두드리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삼성, SK 등 대기업들은 벌써 북한의 22개 특구 중 어떤 곳에 투자하면 좋을지 스터디를 마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투자처를 둘러보고, 계약서를 쓰는 것까지는 제재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남북교류단체의 한 관계자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가 작년 초 즈음해 미국 기업은 언제든 북한에 투자할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을 북측에 전달했다”며 “중·일의 글로벌 기업들도 대북 투자를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북한 대박론’ 주창자인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의 말이 ‘공수표’만은 아닌 셈이다.

일각에서는 그러나 북한 비핵화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성급한 제재완화로 북한 경제에 숨통만 터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핵폐기 대신 핵을 동결하는 낮은 수준의 합의로 북이 시간을 버는 동안 대규모 경제개발 비용만 우리 정부가 떠안으면서 과거 실패 사례를 답습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