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문재인 정부, 경쟁상대는 누구인가
정치인도 가끔은 옳은 말을 할 때가 있다. “야당과 경쟁하는 정당이 아니라 미국 공화당, 일본 자민당, 중국 공산당, 러시아 통합러시아당과 경쟁하는 ‘글로벌 민주당’으로 발전시키겠다.” 지난해 7월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에 나선 송영길 의원의 출사표다. 비록 2위에 그쳤지만 이 대목은 반향이 적지 않았다.

북한을 다녀와서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야당과 싸울 게 아니라 (주변 4강 집권당을) 실력으로 압도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올 1월에는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 “산을 깎는 태양광은 한계가 있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여당의 ‘86(80년대 학번, 60년대생) 그룹’ 중에 이런 소신을 밝힌 건 그가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당내 소수파이고, “시대변화를 잘못 읽었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대다수 ‘86그룹’에는 3~4선(選) 중진이건, 국정책임을 맡았건 반대세력에 각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듯싶다.

최근 정권에 등을 돌린 20대를 향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탓’이라는 날선 비난부터 그렇다. 홍영표 원내대표가 ‘대리 사과’를 했지만 여전히 “동의 못하겠다”는 기류다. 미국 유럽에서 밀레니얼 세대(81~96년생)가 사회주의로 기우는 ‘밀레니얼 사회주의(Millennial socialism)’ 현상과 대비돼 ‘청년 폄훼’ 발언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이 있다.

“경제위기론은 수구우파의 음모”라는 이해찬 대표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일자리 참사, 자영업 궤멸, 저소득층 소득 급감 등을 목격하고도 요지부동이다. 그런 확증편향이 숱한 부작용에도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4대강 보 해체 등을 강행하는 동력인 모양이다.

집권 3년차에 ‘경제 성과’에 대한 조급증도 커진다. 규제 샌드박스 등 전향적 움직임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적폐청산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다. 불안할수록 화장이 짙어지듯, 오히려 ‘더 선명하게’를 외치고 적폐의 외연을 확장할 소지도 있다.

여당 내 다수는 국정 무한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서도 여전히 야당 시절 ‘평론가 기질’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런 기질은 경제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를 가로막는다. 공정거래법·상법 개정안이나 스튜어드십코드에서 보듯이 ‘공정과 정의’라는 라벨을 붙이고, 부작용을 우려하면 “그럼 과거로 돌아가자는 거냐”고 몰아세운다. 정책·규제 수용자인 기업 입장에선 정부여당이 곧 ‘리스크’나 다름없다.

촛불을 내세운 정부의 선명성이 지나치면 자칫 레닌이 지적한 ‘좌익소아병’에 빠질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 좌익소아병이란 혁명 과정에서 어떤 타협도 부정하는 교조주의를 가리킨다. 레닌은 “진정한 혁명가에게 최대 위기는 혁명성을 과장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정치는 산수가 아닌 고등수학이며, 3이 2보다 크지만 앞에 마이너스가 붙으면 거꾸로다.

1990년대 이후 활력이 떨어지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한국병(病)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극한 노사대립, 이념·지역 갈등 등이 대표적인 증세다. 하지만 한국병의 본질은 극한 갈등을 유발하는 사고의 경직성에서 찾는 게 맞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정적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듯이,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3·1운동 100주년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좋든 싫든 지난 100년간 한국인이 피와 땀과 눈물로 쌓아온 ‘모든 것’이다. 아무리 과거를 비판한들 현재가 달라지지도 않는다.

미국 저술가 윌리엄 아서 워드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사람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향해 터뜨리고, 자신의 에너지를 변명이 아니라 해법에 쏟아붓는다”고 했다. 대처는 저효율 고비용의 영국병을, 슈뢰더는 유연한 노동개혁으로 독일병을 치유했다. 지금 마크롱과 아베는 과잉 평등주의의 프랑스병과 총체적 무기력의 일본병 극복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의 경쟁 상대는 이미 흘러간 과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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