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대한문 앞 만세 시위.
3·1운동 당시 대한문 앞 만세 시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 도입부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은 이처럼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전환점이자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뿌리였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오늘날 되새겨야 할 역사적 의미와 정신적 가치를 되짚어본다.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

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낭독한 기미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이다. 민족 대표 33인은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독립선언서에 담았다. 거사일을 3월 1일로 정한 것은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의 국장에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모일 것으로 예상해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은 천도교(15명), 기독교(16명), 불교(2명) 등 모두 종교계 인사였다. 일제가 사회단체를 모두 강제 해산시켜 남은 조직이 종교단체뿐이었기 때문이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 보성사는 2월 27일 독립선언서 2만1000여 장을 인쇄해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3월 1일 당일 민족 대표들은 경찰에 연행됐지만 탑골공원에 모인 4000여 명의 시민은 만세를 부르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서울과 평양뿐 아니라 평안북도 의주와 선천, 함경남도 원산 등 7개 도시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박은식이 쓴《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그해 5월까지 전국적으로 1500회가 넘는 시위가 열렸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 수는 당시 인구의 10%인 202만 명에 달했다. 일제는 폭력적인 탄압으로 대응했다. 박은식은 3·1운동으로 이후 3개월간 7509명이 사망하고 1만5961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했다.

민주공화정의 기반 마련

3·1운동의 정신은 임시정부 탄생의 씨앗이 됐다. 만세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열기를 확인한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그해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 모여 임시의정원을 창설했다. 다음날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를 공포했다.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의 전환을 알린 역사적인 순간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정체성은 이후 제헌헌법의 기초가 됐다.

역사 연구자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부상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한국근현대사학회가 펴낸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를 통해 “3·1운동을 계기로 유생 중심의 복벽주의(조선왕조 복구) 노선은 자취를 감췄고, 국내외 임시정부는 모두 민주공화제를 표방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을 ‘민주주의 관점에서 근대와 현대를 나눌 만큼 획기적인 분기’라고 평가한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도 최근 출간한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에서 “누구나 조직하고 누구나 참여하는 자발성이 3·1운동의 전국화와 일상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1918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동 측면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김학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3·1운동을 ‘민족사와 세계사의 결정적 조우’라고 표현했다.

논쟁 넘어 새 패러다임 접근도

민족 대표들의 대표성,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통성 등을 두고 논란이 없지 않다. 33인 민족 대표 중 일부의 친일 전력 때문이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고쳐 부를 것을 제안한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3·1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을 통해 최린, 정춘수, 박희도의 친일 변절, 월북으로 국가 서훈 대상에서 제외된 김창준을 언급한다. 그는 “그럼에도 33인이 3·1혁명을 이끈 공로는 폄훼할 수 없다”며 “그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면 선언서는 한낱 불온유인물에 불과했을 것이고 민족적인 거사에 불을 붙이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임시정부가 여러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부정적 평가는 2000년대 이후 임시정부가 지향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재조명되면서 사그라들었다.

독립, 민족을 넘어 차별과 폭력의 극복이라는 새로운 틀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3·1운동을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보다는 자유와 평등, 평화를 위한 세계시민의 주권회복 운동 성격으로 해석해야 한다”며 “현시점에서 한국의 정신적 뿌리인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여는 것은 시대적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