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 못 열고 폐원 수순 밟는 국내 1호 투자개방형 병원
국내 첫 투자개방형 병원인 녹지국제병원이 끝내 파국을 맞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말 개설 허가를 받은 녹지국제병원이 개원 시한을 지키지 못해서다. 제주도가 허가 취소를 위한 청문 계획을 밝힌 만큼 녹지국제병원이 문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좌초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는 투자개방형 병원 허가에 부정적이어서 당분간 국내에서 투자개방형 병원이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개설 허가 90일 만에 취소 절차 돌입

제주도는 녹지국제병원이 약속된 기간 안에 문을 열지 않아 5일부터 허가 취소를 위한 청문 절차를 시작한다고 4일 발표했다. 의료법에 따라 의료기관은 개설 허가를 받은 뒤 3개월 안에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개설을 허가한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의료기관 문을 열지 않으면 청문 절차를 거쳐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제주도는 지난해 12월 5일 녹지국제병원에 외국인 진료 조건부 허가를 내줬다. 하지만 녹지국제병원은 시한 마지막날인 이날 문을 열지 않았다. 안동우 제주도 정무부지사는 “개설 허가 후 충분한 준비기간을 줬다”며 “지난달 27일 개원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 점검을 했지만 공무원 출입을 제한하는 등 정당한 공무집행을 기피했다”고 지적했다. 제주도는 현장점검을 못하게 한 것이 의료법상 허가 취소에 해당한다는 내용의 공문도 녹지국제병원 측에 전달했다.

‘외국인 조건부’가 소송·청문 쟁점

제주도는 대학교수, 변호사, 공인회계사, 전직 청문 담당 공무원 중 한 명을 청문주재관으로 선정한 뒤 5일부터 청문 절차를 밟는다. 이후 병원 사업자인 중국 뤼디그룹 의견 등을 듣고 최종 허가 취소 여부를 결정한다. 기간은 한 달 정도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뤼디그룹 측은 지난달 14일 “녹지국제병원을 외국인만 진료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 부당하다”며 제주도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녹지국제병원 측은 중국 의료 관광객이 줄어들어 외국인 진료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어렵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 조건부 개설 허가가 병원 사업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등이 행정소송과 청문 과정의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주도는 “외국인 전용으로 보건복지부 사업 승인을 냈기 때문에 문제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뤼디그룹과 녹지국제병원 측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 뤼디그룹이 녹지국제병원 논란을 계기로 제주도 헬스케어타운 투자를 포기하고 대규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대해 제주도는 “헬스케어타운 사업 전체에서 녹지국제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작다”며 “병원 인허가 문제 때문에 사업 전반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좌초하는 투자개방형 병원

제주도가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를 취소하기 위한 청문 절차에 들어가면서 국내 투자개방형 병원 설립은 또다시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투자개방형 병원은 외부 투자를 받고 수익이 나면 자유롭게 배당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대신 민간 보험사와 계약을 맺고 진료비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외국인 의사가 직접 환자를 보는 것도 허용된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을 바꿔 국내 투자개방형 병원 설립 근거를 마련했다. 한국이 동북아시아 허브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환자 유치 등을 통해 의료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투자개방형 병원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내국인 진료를 허용했다. 이듬해 투자개방형 병원 설립 지역은 경제자유구역에서 제주도로 확대됐다.

그동안 송도, 제주도 등에 투자개방형 설립 논의가 진행됐지만 번번이 좌초했다. 의료 민영화 신호탄이라는 시민단체, 정치권 등의 반대에 막혀서다. 녹지국제병원 이후 추가로 투자개방형 병원을 세우겠다고 복지부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곳은 없다. 국제병원 설립이 유력하게 거론되던 송도 부지는 지난해 2월 국내 종합병원 부지로 전환됐다. 지나친 정치 논쟁에 해외 투자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지현/제주=임동률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