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중 산안법 시행령·지침 발표
"산업특성 반영 못한 기준 도입될라"
이르면 이달 말로 예정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시행령 및 지침 발표를 앞두고 국내 반도체업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수만 명의 임직원이 24시간 근무하는 반도체산업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규제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도입된 규제가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훼손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이달 시행령을 입법예고한 뒤 내년 1월16일부터 개정 법안을 적용할 계획이다.
“공장 가동 중단 땐 막대한 손실 불가피”
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산업안전법 주요 개정안에 대한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해 반도체산업협회를 통해 정부 측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기 위해 1, 2차 협력회사 의견도 수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가 우려하는 시행령 및 지침 세부 내용은 △작업중지 요건 △도급인의 안전·보건 책임 범위 △정부에 제출할 물질안전보건자료의 범위와 기준 △대표이사의 이사회 보고 요건 등이다. 이 가운데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조항은 대폭 확대된 고용노동부 장관의 작업 중지 권한이다. 반도체업계는 “사업장 규모가 크고 작업 중단 뒤 공장을 재가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도체산업 특성상 한번 작업 중지 명령이 내려지면 막대한 매출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3월 삼성전자 평택공장의 정전 사태 당시 불과 40분 정전 사고로 인한 회사 매출 손실이 500억원 안팎에 달했다. 작업 중단 조치 후 원인 규명 및 해소, 재가동 등 절차마다 별도의 심사가 이뤄지면 작업 중단 기간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우려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정부가 2017년 10월부터 2018년 2월까지 5개월간 중대재해 사업장으로 지목한 5개 대기업의 사업장 가동 중지 기간은 평균 21일에 달했다. 작업 중단 요건 등 세부 기준을 ‘고용부 지침’으로 정하려는 점도 논란거리다. 업계에선 ‘대규모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행정처분의 판단 기준을 법이나 시행령도 아닌, 정부 지침으로 정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의견을 내고 있다.
협력사 안전 관리하면 불법파견?
일감을 발주하는 도급인이 책임져야 할 안전과 보건 의무의 범위도 산업계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분야다. 산업안전법 개정안은 산업현장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등 사고 책임을 원칙적으로 원청업체가 지도록 한다. 반도체업계의 경우 과거 주로 1차 협력사를 대상으로 했던 안전·보건 의무가 2, 3차 협력사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자체 조사한 결과 관리·감독 대상 기업 수가 50배 이상 늘어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안전과 보건 문제에 대한 원청업체의 업무지시가 불법파견 및 경영간섭 등으로 오인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고 털어놨다.
정부에 제출해야 할 물질안전보건자료의 대상과 범위도 시행령에서 정해진다. 반도체업계는 기존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른 규제와 중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업계 관계자는 “영업비밀이 담겨 있는 중요 자료가 관리 부주의로 외부에 유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 △사고 발생 시 경영진 처벌 기준 △건설공사 사고로 인한 발주업체 처벌 기준 △재하도급 금지 기준 등도 업계의 경쟁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사안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기업들은 “산업현장의 안전과 보건 문제를 체계적으로 따져보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정부가 새로운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도체협회 관계자는 “기업들이 우려 사항을 정부에 전달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경총 관계자는 “반도체업계뿐 아니라 건설, 조선, 자동차, 화학 업체들도 산업안전법 개정에 따른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산업 특성과 다양성을 무시하고 일괄 규제를 하면 탈이 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