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30-50클럽' 유지 어렵게 하는 정책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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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의지와 제도, 의식과 지력이 성장 원천
편가르기로 표만 구하는 좌파적 사고 접고
혁신의지 돋워 신사업 키우고 노동 개혁해야
조동근 < 명지대 명예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편가르기로 표만 구하는 좌파적 사고 접고
혁신의지 돋워 신사업 키우고 노동 개혁해야
조동근 < 명지대 명예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을 충족하는 ‘30-50클럽’ 안착은 대단한 성취다. 2018년 말 현재 30-50클럽에 이름을 올린 국가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한국 7개국뿐이다. 식민지를 가진 경험이 없는 국가, 오히려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가 30-50클럽에 진입한 것은 명실공히 한국이 처음이다.
수성(守城)은 창업만큼 어렵다. 스페인, 그리스 등은 3만달러를 넘었다가 2만달러대로 뒷걸음질한 경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신산업을 키우고 노동시장을 개혁하지 못하면 2만달러대로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 해외 기관의 한국 경제를 향한 시선도 우호적이지 않다. 한국과 각을 세워온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치는 2.1%다. 크레디트스위스도 성장률 전망치를 2.8%에서 2.4%로 내렸다. 고용·투자·수출에서 3중고(苦)가 예상된다는 이유에서다. 성장률 전망치로 시야를 좁혀서는 안 된다.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경제 성장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본, 노동, 기술이 성장의 원천일 수 없다. 성장의 원천은 국민경제를 꾸려가는 소프트웨어로서의 ‘경제 하려는 의지’와 합리적 경제정책을 가능케 하는 ‘제도와 의식’ 그리고 ‘정책 엘리트의 경제지력’으로 압축된다. 경제의 소프트웨어를 친(親)시장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문재인 대통령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함께 이룬 경제 성장의 혜택이 소수의 상위 계층과 대기업에 집중됐고 모든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또 “GDP(국내총생산) 대비 기업소득 비중은 경제성장률보다 계속해서 높아졌지만 가계소득 비중은 계속해서 낮아졌으며, 낙수효과는 오래전 끝났고, 어느덧 우리는 ‘부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면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다. 성장은 했지만 불평등이 커져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불평등은 이념이나 주장이 아니라 ‘사실관계’에 기초해 판단해야 한다. OECD에 따르면 2016년 현재 한국의 지니계수(0.295)는 프랑스(0.291)보다 높고 그리스(0.333)와 미국(0.391)보다 낮다. 한국의 5분위 배율(5.1·2015년 기준)도 프랑스보다 높고 그리스, 미국보다 낮다. 지니계수와 5분위 배율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소득 불평등도가 가장 높다’는 진단은 사실이 아니다.
가계소득 비중 하락도 세심하게 해석해야 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8년 5월 발간한 ‘가계·기업 소득 간 성장 불균형 원인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 GNI가 연평균 6.6% 증가하는 동안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은 각각 6.0%, 8.1% 늘었다. 기업소득이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긴 했지만, 가계소득도 꾸준히 늘었다. 보고서는 가계소득 둔화의 원인으로 ‘자영업의 침체, 가계부채 증가로 인한 순이자 소득 감소, 내수 부진 및 서비스산업 침체’를 지목했다.
2000~2015년으로 좁혀보면 기업 부문에서 가계 부문으로의 ‘소득환류성’을 보여주는 피용자보수와 배당금 비중이 각각 5.2%포인트, 3.2%포인트 상승했다. 기업으로부터의 환류가 과소해서 가계소득 비중이 준 것이 아니다. 기업의 인건비 지출과 배당은 꾸준히 증가했다. 가계소득 감소의 가장 큰 요인은 자영업의 부진과 가계부채 누적에 따른 이자소득 감소다. 기업이 가계의 소득을 빼앗거나 정당한 몫 이상을 가져가서가 아니다.
낙수효과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삼성전자 협력사 모임인 ‘협성회’ 149개 회원사의 2017년 평균 영업이익률은 8.5%로 업체 평균의 두 배에 이른다.
성장은 분배 그 이상이다. 시장에서 기회를 포착해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부가가치를 새로이 창출할 때 ‘추가로 나눌 그 무엇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경제주체의 혁신의지와 동기를 북돋워야 한다. 편을 갈라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해 정치기반을 넓히려는 좌파적 정책사고가 제어되지 않으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대로의 후퇴는 예정된 길일지 모른다.
수성(守城)은 창업만큼 어렵다. 스페인, 그리스 등은 3만달러를 넘었다가 2만달러대로 뒷걸음질한 경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신산업을 키우고 노동시장을 개혁하지 못하면 2만달러대로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 해외 기관의 한국 경제를 향한 시선도 우호적이지 않다. 한국과 각을 세워온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치는 2.1%다. 크레디트스위스도 성장률 전망치를 2.8%에서 2.4%로 내렸다. 고용·투자·수출에서 3중고(苦)가 예상된다는 이유에서다. 성장률 전망치로 시야를 좁혀서는 안 된다.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경제 성장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본, 노동, 기술이 성장의 원천일 수 없다. 성장의 원천은 국민경제를 꾸려가는 소프트웨어로서의 ‘경제 하려는 의지’와 합리적 경제정책을 가능케 하는 ‘제도와 의식’ 그리고 ‘정책 엘리트의 경제지력’으로 압축된다. 경제의 소프트웨어를 친(親)시장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문재인 대통령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함께 이룬 경제 성장의 혜택이 소수의 상위 계층과 대기업에 집중됐고 모든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또 “GDP(국내총생산) 대비 기업소득 비중은 경제성장률보다 계속해서 높아졌지만 가계소득 비중은 계속해서 낮아졌으며, 낙수효과는 오래전 끝났고, 어느덧 우리는 ‘부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면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다. 성장은 했지만 불평등이 커져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불평등은 이념이나 주장이 아니라 ‘사실관계’에 기초해 판단해야 한다. OECD에 따르면 2016년 현재 한국의 지니계수(0.295)는 프랑스(0.291)보다 높고 그리스(0.333)와 미국(0.391)보다 낮다. 한국의 5분위 배율(5.1·2015년 기준)도 프랑스보다 높고 그리스, 미국보다 낮다. 지니계수와 5분위 배율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소득 불평등도가 가장 높다’는 진단은 사실이 아니다.
가계소득 비중 하락도 세심하게 해석해야 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8년 5월 발간한 ‘가계·기업 소득 간 성장 불균형 원인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 GNI가 연평균 6.6% 증가하는 동안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은 각각 6.0%, 8.1% 늘었다. 기업소득이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긴 했지만, 가계소득도 꾸준히 늘었다. 보고서는 가계소득 둔화의 원인으로 ‘자영업의 침체, 가계부채 증가로 인한 순이자 소득 감소, 내수 부진 및 서비스산업 침체’를 지목했다.
2000~2015년으로 좁혀보면 기업 부문에서 가계 부문으로의 ‘소득환류성’을 보여주는 피용자보수와 배당금 비중이 각각 5.2%포인트, 3.2%포인트 상승했다. 기업으로부터의 환류가 과소해서 가계소득 비중이 준 것이 아니다. 기업의 인건비 지출과 배당은 꾸준히 증가했다. 가계소득 감소의 가장 큰 요인은 자영업의 부진과 가계부채 누적에 따른 이자소득 감소다. 기업이 가계의 소득을 빼앗거나 정당한 몫 이상을 가져가서가 아니다.
낙수효과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삼성전자 협력사 모임인 ‘협성회’ 149개 회원사의 2017년 평균 영업이익률은 8.5%로 업체 평균의 두 배에 이른다.
성장은 분배 그 이상이다. 시장에서 기회를 포착해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부가가치를 새로이 창출할 때 ‘추가로 나눌 그 무엇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경제주체의 혁신의지와 동기를 북돋워야 한다. 편을 갈라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해 정치기반을 넓히려는 좌파적 정책사고가 제어되지 않으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대로의 후퇴는 예정된 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