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감·소외감에 정신병적 증상도 보여
치매 전구증상일 수도…치료엔 잘 반응
김진세 <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 >
올해로 칠순인 할머니가 상담을 왔다. 할머니가 말씀이 없자, 자녀들이 상태를 설명하면서 걱정을 했다. 뉴스에서 연일 치매의 위험성을 강조하다 보니, 자녀들은 덜컥 겁부터 났다. 하지만 건망증이 생기는 병은 치매뿐만이 아니다. 가장 흔한 건망증의 원인은 연령에 따라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너무 바쁠 때다. 하는 일이 많으면 집중을 유지하기 힘들어 자꾸 까먹는다. 노인이라면 노화가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정상적인 노화 과정에서 인지기능이 떨어지니 기억력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자녀를 내보내고 할머니와 상담을 시도했다. 어디가 불편한지, 마음 상할 일이 있었는지,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는지 등 여러 가지 질문에도 답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말이 없던 할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죽고 싶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벌써 5년을 혼자 살았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살기 싫습니다. 게다가 치매까지 앓게 됐으니…. 아이들 고생시키느니 차라리….”
그렇게 살갑지도 않던 사이였는데 혼자가 되니 괜히 보고 싶고, 살아생전에 잘해주지 못했던 기억만 나서 죄책감도 생겼다고 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제대로 기억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제 그만 따라 갈 때가 됐는가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것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검사를 안 받겠다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간단한 인지기능 및 치매검사를 했다. 우려와는 달리 치매는 아니었다. 정신의학적 인터뷰와 감정상태를 종합해서 평가해 보니 할머니는 ‘노인성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2017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전체 우울증 환자 중 60세 이상이 39.6%에 달한다. 같은 해 보건복지부의 ‘노인실태조사’에서는 노인 중 21%가 우울 증상을 겪고 있고, 이들 중 67%는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원인은 다른 연령대와 마찬가지로 ‘상실’이 가장 흔하다. 돈, 건강, 대인관계를 잃고 생긴 상실감으로 우울해진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겪는 소외감도 큰 원인이 된다.
노인 우울증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슬프다’ ‘우울하다’ ‘불안하다’ 등 심리적 증상보다는 ‘소화가 안 된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이 답답하다’ 등 다른 질병을 의심할 수 있는 신체적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또 상태가 심각해지면 정신병적 증상이 적잖이 나타난다. 누군가가 자신의 돈이나 물건을 훔쳐간다는 ‘피해망상’이나 현실에 비해 자신의 경제적 상태가 엉망이라는 ‘빈곤망상’, 배우자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하는 ‘질투망상’ 등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기억력 장애가 있다. 실제로 치매를 염려해서 병원을 찾는 노인 환자 중에 적잖은 수가 노인 우울증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노인 우울증을 ‘가성치매(假性癡)’라고도 한다.
문제는 병의 경과다. 노인 우울증이 모두 치매인 것은 아니지만, 치매의 전구증상(본격적인 질환이 시작되기 전 단계)일 수 있다. 심지어는 노인 우울증과 치매의 뿌리를 한 곳에서 찾기도 한다. 고혈압이나 중풍 등으로 대뇌 혈관계에 이상이 생긴 경우 감정을 지배하는 신경 영역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치매도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최근 임상에서는 노인 우울증을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치료에 잘 반응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노인을 돌보는 것은 가족과 함께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무다. 노인 스스로도 건강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최선의 치료는 예방이라고 하지 않던가. 충분한 수면과 영양의 균형을 고려한 식사, 규칙적인 일과, 하루 3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 그리고 친구들과의 대화와 즐거운 취미생활이 노인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