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안녕·풍어를 비나이다…죽도가 지켜낸 남해안별신굿, 굿판은 슬픔과 기쁨을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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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32> 경남 통영 죽도
![남해안별신굿에서 무녀는 지모 또는 승방이라고 불린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AA.19157451.1.jpg)
음악, 무용, 연극의 종합예술 별신굿
별신굿 굿판을 주도하는 것은 지모와 산이 들이다. 황해도 배연신굿판에서 무녀를 무녀라 부르지 않고 만신이라 하듯 남해안별신굿에서도 무녀를 지모 혹은 승방이라 칭한다. 산이는 연주를 하는 악사다. 큰 악사인 대사산이는 지모와 산이를 길러내는 큰 스승이자 세습무다. 견습 무녀는 젖지모, 큰 무녀는 대모라 칭한다. 오늘 굿판의 총연출자인 대사산이 정영만 선생은 국가무형문화재(82-4호) 남해안별신굿 보유자인데 거제, 통영 세습무가의 11대 무(巫)다. 거제 통영 지역의 단골판에는 박, 정, 노, 이씨 네 집안의 세습무가가 있었지만 이제 남은 집안은 정씨무가뿐이다.
![통영과 거제 등 경상도 남해안에 어촌마을 곳곳에서 거행되던 대동굿 남해안별신굿은 매년 정월마다 죽도에서 펼쳐진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AA.19157461.1.jpg)
![별신굿은 무녀와 함께 굿판을 주도하는 악사를 산이라 칭한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AA.19157452.1.jpg)
섬 주민들 300년 이어온 죽도실록 만들어
두 번째 날, 죽도의 새벽이 밝았다. 굿판은 6시부터 시작된다. 지모와 산이들이 당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낸다. 당산 할매에게 제물을 바치며 섬이 평안하고 무탈하도록 보살펴 주십사 기원을 드린다. 당산에서 내려온 지모와 산이들은 매구패를 앞세우고 마을 ‘골목’에도 제를 올린다. 골메기굿이다. 옛날 섬에 물이 얼마나 귀했던가. 그래서 생명수인 우물에서 우물굿을 하고, 재앙을 막아주는 벅수 앞에서 벅수굿을 하고, 마을 집들을 돌며 지신밟기를 해서 잡귀를 땅에 묻어버리고, 바닷가에 나와 풍어와 바닷길의 안녕을 기원하는 선왕굿과 용왕굿을 한다. 이제 용왕과 마을신들을 제청으로 초청하는 것으로 골메기굿이 끝나고 비로소 큰 굿이 시작된다. 지동굿이다.
![죽도 섬 주민들의 교통수단인 소형 여객선, 죽도는 조선시대 공도정책으로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AA.19157460.1.jpg)
![섬 주민들이 집집마다 정성껏 차려낸 밥상.](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AA.19157465.1.jpg)
아픔과 슬픔을 나누는 잔치 굿판
![섬 주민들이 공동 작업한 김장김치.](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AA.19157466.1.jpg)
한국의 무속은 한강 이북은 강신무, 한강 이남은 세습무다. 무(巫·샤먼)의 특성은 엑시터시, 트랜스, 포제션이다. 엑시터시는 탈혼, 즉 영혼의 타계 여행이다. 트랜스는 의식 변화의 첫 단계로 단순 변환 상태다. 트랜스를 통해 두 번째 단계인 엑시터시나 포제션 상태로 발전한다. 포제션은 빙의다. 엑시터시 타입은 시베리아, 포제션 타입은 주로 남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등지에 분포한다. 한국의 강신무는 포제션 타입이다. 세습무는 단골이라고도 하는데 혈통을 따라 이어지며 단골판이라는 일정한 관할구역을 가진다. 단골은 반드시 신의 하강로인 신간을 갖추고 신의 메시지를 받지만 어떤 신을 모신다는 구체적인 신관은 희박하다.
제청에서 굿판이 끝나고 오늘 별신굿의 마지막인 ‘개갈이’가 시작된다. 개는 마을 앞바다다. 개의 물을 새롭게 갈아주는 굿. 섬 주민들과 산이들은 용왕님께 바칠 제물을 만선기를 단 어선에 가득 싣고 앞 바다로 나간다. 어선이 마을 앞 바다를 세 차례 돌며 제물과 음악을 바치는 동안 뭍에 남은 주민들은 용왕님께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빌고 또 빈다. 이로써 죽도 마을 대동굿인 별신굿이 끝났다. 옛날 섬이 삼치잡이로 융성하던 시절에는 별신굿판이 1주일씩 이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틀도 벅차다. 우리 섬의 현실이고 우리 전통문화의 아픔이다.
노인 30여 명 사는 쇠락한 섬
죽도는 면적 0.67㎢, 해안선 길이 3㎞의 아담한 섬이다. 조선의 공도정책으로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섬에 임진왜란 무렵 진양 강씨와 경주 정씨가 입도하면서 끊어졌던 섬의 역사가 다시 시작됐다. 임진왜란 중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 함선들이 화살을 만들 대나무를 이 섬에서 많이 베어 사용하면서 죽도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1945년 5월에 개교해 죽도 아이들 교육의 요람이던 한산초등학교 죽도분교는 1994년 3월 폐교되고 말았다. 학교는 이제 ‘재단법인 재기중소기업개발원’ 건물이 돼 연수원으로 사용 중이다. 실패한 중소기업인들의 재기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아주 허물어지지 않고 무언가 의미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죽도는 한때 통영에서도 부자 섬으로 유명했다. 어업에 일찍 눈 떴던 죽도 주민들은 1970년대 삼치를 잡아 일본 수출액 1억원을 달성하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섬에 40~50척의 어선이 있었고 전복, 소라 등의 해산물도 풍부해 1973년 주민 516명일 때 제주 해녀가 120명이나 들어와서 채취하기도 했다. 채취한 해산물은 배 주인이 4할, 해녀가 6할을 가졌다. 1975년에는 죽도의 새마을금고 기금이 1억원을 돌파했다. 새마을금고중앙회에서 전체 2등을 했으니 그야말로 돈 섬이었다. 하지만 지금 죽도는 노인 30여 명만 사는 아주 쇠락한 섬이 되고 말았다.
이 나라 섬들에는 유독 여신이 많은데 죽도의 주신 또한 여신인 당산 할매다. 당산 조모라고도 한다. 죽도 당산 아래는 자연적으로 생긴 200여 평의 못이 있는데 방죽못 혹은 당중못이라고도 한다. 이 방죽못은 여름철이면 당산 할매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안개 낀 여름날 새벽 방죽못에는 서기가 피어오르고 당산 할매 목욕하는 물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방죽못을 신성시해 늘 깨끗이 청소하고 소중히 여겼다. 옛날 어떤 사람이 오줌 바가지를 씻었고 또 어느 여인은 구정물을 부었다가 당산 할매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당중못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른 적이 없었다. 주민들의 농사와 생활에 참으로 소중한 못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신성시했을 것이다. 인구가 많을 때는 땔감이 부족했지만 당산의 나무만큼은 손도 못 댔다. 2만 평의 당산이 잘 보존된 이유다. 죽도의 별신굿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터다.
![마을 안녕·풍어를 비나이다…죽도가 지켜낸 남해안별신굿, 굿판은 슬픔과 기쁨을 나누고…](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AA.14223153.1.jpg)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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