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5단계(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로 나눠진 일반직 직급을 1~2개로 통합하기로 했다.
내부적으로는 세 가지 안이 검토되고 있다. 첫 번째 안은 사원과 대리를 ‘주니어’로, 과장 이상은 ‘시니어’ 직급으로 묶는 것이다. ‘책임’(사원 대리)과 ‘수석’(차장 부장)으로 통합하는 방안도 검토 대상이다. 직급을 아예 없애고 사원에서 부장급까지는 서로를 ‘OO님’으로 부르게 하는 안도 후보로 올라와 있다. 현대차는 이달 직원 의견을 취합한 뒤 검토작업을 거쳐 연내 새 직급체계를 적용할 계획이다.
다른 기업들도 잇달아 직원 직급체계와 호칭을 바꾸고 있다. 삼성전자에 이어 삼성전기 삼성SDI 등 삼성그룹 다른 전자 계열사들도 지난 1일부터 직급체계를 ‘커리어 레벨(CL) 1~4단계’로 통합하고 직원 간 호칭을 ‘프로님’으로 바꾸도록 했다. SK하이닉스는 올 1월부터 기술사무직 직원의 호칭을 ‘TL(기술 리더)’로 통일했다.
사원도 프로님, 부장님도 매니저~ 사라지는 연공서열
“한국의 한 기업에서 연공서열이 무너지고 있다.”
2007년 8월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SK텔레콤이 2006년 10월 4대 그룹 주요 계열사 중 처음으로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직급을 모두 ‘매니저’로 통일한 것을 분석한 기사였다.
그로부터 12년. SK텔레콤이 시작한 연공서열 파괴는 재계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산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급속도로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직급에 갇힌 수직적인 문화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 경영진의 진단이다.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현대자동차가 직급 체계를 1~2단계로 단순화하기로 한 것도 ‘그릇’이 변해야 ‘본질’이 변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자율주행 및 차량공유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동차산업은 전통 제조업에서 정보통신기술(ICT)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현대차가 이달부터 완전 자율 복장제를 시행한 것도 같은 이유다. “ICT 기업보다 더 ICT 기업 같은 회사를 만들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전자업계도 실리콘밸리식 문화를 수혈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7년부터 기존 직급 제도를 폐지하고 4단계로 줄인 새로운 직급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CL(커리어 레벨) 1~4단계로 CL1(고졸 사원)·CL2(사원 대리)·CL3(과장 차장)·CL4(부장)로 나뉜다. 호칭도 ‘프로님’으로 통일했다. 이달부터는 삼성전기, 삼성SDI 등 전자 계열사로 확대 적용한다.
SK하이닉스는 올해 1월부터 사원·선임·책임·수석으로 나뉘어 있던 기술사무직 전 직원의 호칭을 TL로 통일했다. TL은 ‘기술 리더(테크니컬 리더)’와 ‘재능있는 리더(탤런티드 리더)’의 중의적인 표현이다. 이번 결정은 애플, 인텔, 넷플릭스 등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의 조직문화를 둘러본 직원들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권력과 권위는 직원들의 의성을 가로막는다”는 인텔의 인사철학과도 맥을 같이한다.
변화에 민감한 전자·통신 부문뿐만 아니라 전통 제조업 부문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정유 화학 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아예 팀장이라는 직책을 없애버렸다. 대신 각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장’을 PL(프로페셔널 리더)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부서 간 경계를 허물고 필요에 따라 빠르게 팀을 구성해 업무를 수행하는 ‘애자일(agile·민첩한) 조직’을 꾸리기 위해서다. 필요에 따라 후배가 PL을 맡아 선배를 지휘하는 것도 가능하다.
LG그룹도 2017년부터 사원·선임(대리 과장)·책임(차장 부장) 제도를 정착시켰고, LS그룹 일부 계열사도 올해부터 직급 체계를 통합해 어소시에이트 매니저(사원 대리)·매니저(과장 차장)·시니어 매니저(부장)로 간소화했다. 직급 파괴는 직원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SK그룹은 이르면 오는 7월 임원 직급을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국내 주요 그룹 중 임원 직급을 통일하는 첫 사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급 체계에 갇혀 있으면 인재를 적재적소에 쓸 수 없다”며 몇 차례나 인사팀에 직접 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 문화가 형식을 따라가지 못해서다. ‘매니저’ 호칭을 쓰는 SK 계열사 관계자는 “자신보다 연차가 낮으면 ‘김매’, 비슷하면 ‘김 매니저’, 높으면 ‘김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그 안에서 연차를 구분해 부른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계열사의 입사 14년차 박모 프로는 대외 업무를 할 때면 자신을 ‘차장’이라고 소개한다. 공식 직급으로는 CL3이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그래서 몇 년차냐”고 물어보는 상대가 많아서다. 과장과 차장 직급을 합친 CL3에서 CL4로 승진하는 데는 평균 10년이 걸린다. 외부에서 보면 승진을 10년 동안이나 못 한 ‘만년 과장’으로 여기는 일도 생긴다.
글로벌 트렌드에 맞춰 영어식 표현으로 직급 체계를 개편하면서 외부에서 볼 때는 이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온다. SK그룹 내부에서도 호칭이 ~님(SK텔레콤), 매니저(SK E&S·SKC), TL(SK하이닉스), PL(SK이노베이션) 등으로 가지각색이라 “계열사 직원끼리 만나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헷갈린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고재연/도병욱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