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이사에서 물러나게 됐다. 27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정관은 이사 선임을 특별결의사항으로 분류, 주총 참석 주주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조 회장 연임안은 66.67%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이날 표결에서 64.1%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표이사 직을 내놓게 됐다. 이번 일은 주주권 행사 강화 바람을 타고 대기업 총수가 CEO에서 물러나는 첫 사례가 될 전망이다. 연임안이 부결된 데는 2대 주주로 지분 11.56%를 보유한 국민연금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국민연금은 26일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열고 재선임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어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 소지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같은 국민연금의 입장에 외국계 연기금들까지 동참하면서 조 회장은 연임에 실패했다. 하지만 재판 중이라는 이유로 ‘재선임 반대’를 결정한 것은 헌법에 명시된 ‘무죄추정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국민연금이 헌법을 어긴 것은 심각한 문제다. 현 정부 들어 ‘무죄추정의 원칙’을 대놓고 무시하는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철호 부위원장을 불법 재취업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 했다가 무죄 판결을 받자 원상복귀 조치를 내린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현직 법관 6명을 재판 업무에서 배제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연금을 통해 민간기업 경영에 관여하는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른바 ‘재벌 갑질’에 대한 사회적 공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CEO를 끌어내리는 것은 무죄추정 원칙을 위반한 의결권 남용이다. 조 회장의 ‘낙마’가 기업가치 제고에 도움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 오너 경영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국민정서법’에 따르느라 헌법을 위반한 의결권 행사야말로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행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