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 과감한 국유기업 불하…'고도성장 주역' 자유기업 키웠다
개인의 보전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은 각인(各人)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고 재산권을 보장한다고 했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를 인정한다고도 했다. 이런 근거에서 이 나라의 경제체제는 통상 자본주의로 불리는 시장경제로 성립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헌법 제100조는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을 가진다’고 했다. 이로써 1905년 이래 이 땅에 이식되고 정착해온 시장경제체제의 제반 제도와 기구가 이 나라의 것으로 계승됐다. 각인을 사권(私權)의 주체로 법인하고 그 인격권과 재산권을 규정한 총독부의 민법은 일본어로 쓰인 그대로 이 나라의 민법으로 의용(依用)됐다.

상법도 마찬가지였다. 이 나라가 제 언어로 제 민법과 상법을 제정한 것은 1958년과 1962년의 일이다. 이 나라는 식민지 기원의 제반 법제를 계승함으로써 ‘개인’을 보전함에 성공했다. 북한의 공산세력은 ‘개인’을 파괴했다. 남한에서 살아남은 근대문명의 기초 범주는 이 나라 경제가 그 초라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이후 크게 번창하게 된 근본 동력을 이뤘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 후 촬영한 제헌 국회의원들의 단체사진.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 후 촬영한 제헌 국회의원들의 단체사진.
혼합경제체제

이 나라의 시장경제는 그것이 맨 처음 꽃피운 서양의 그것과는 자못 상이한 형태였다. 다수 한국인에게 개인, 자유, 재산권의 가치는 여전히 어색하고 서투른 박래품(舶來品)이었다. 헌법은 사회로부터 우러났다기보다 국민국가를 건립하기 위한 법적 요식의 일환으로 제정됐다.

헌법 초안은 일정기에 법학 교육을 받거나 문관시험에 합격한 젊은 법률가 몇 사람의 책상머리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정치에 관해서는 미국 헌법을, 경제에 관해서는 독일 헌법을 참조했다. 여러 나라의 헌법을 절충한 결과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에는 해설하기 곤란한 복잡성이 가해졌다. 헌법은 재산권은 보장된다고 하면서도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하며 그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나아가 각인의 경제상 자유도 사회정의의 실현과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이라는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했다.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1888~1957). 제헌국회의원으로서 ‘민족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1888~1957). 제헌국회의원으로서 ‘민족사회주의’를 주창했다.
헌법상의 경제체제는 이런 강령에 바탕해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섞은 혼합경제체제로 설정됐다. 예컨대 헌법은 운수, 통신, 금융, 전기 등 주요 산업은 국유와 국영으로 관리하며, 대외무역은 국가통제 하에 두며, 필요에 따라 사기업을 국영 내지 공영으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하며, 사기업 근로자는 기업 이익의 분배에 참가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그에 대해 소수 의원이 경제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과 통제를 걱정했다. 그러자 몇몇 유력 정치인이 이 나라의 경제는 ‘민족사회주의’여야 한다고 소리쳤으며, 다수 의원이 그에 동조했다. 헌법 제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색깔을 구분하기 힘든 민족주의 열정으로 충일했다.

귀속재산

당초 미군정은 일본인의 재산권을 인정했다. 이후 미군정은 그 방침을 철회하고 일본인의 총철퇴령을 내렸다. 총독부, 일본 기업, 일본인이 소유한 재산은 미군정의 재산으로 귀속됐다. 1946년 일본 정부는 도쿄의 연합군사령부와 공동으로 남북한에 남겨진 그들의 재산이 얼마인지를 조사했다. 당시 가격으로 남한에 23억달러, 북한에 30억달러였다. 남한에 남겨진 일본 재산은 당시 남한 국부의 80%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독립 이후 미군정은 그 재산을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했다.

헌법이 이 나라의 경제체제를 혼합경제로 규정한 것은 현실적으로 주요 산업과 기업이 국유와 국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부는 그 방대한 재산과 기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경영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혼합경제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1949년 정부 재정수입에서 조세가 차지하는 비중, 곧 재정자립도는 20%에 못 미쳤다. 귀속재산은 민간 기업가에게 불하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야 공장도 돌아가고 정부재정도 건전해질 터였다.

자유기업주의로의 전환

6·25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한 미국은 뒤늦게 한국 헌법의 문제점을 인지했다. 미국의 의원과 기업가는 한국 정부가 사기업을 부정하는 헌법을 그대로 안고서는 미국의 원조와 투자를 받을 수 없다고 압력을 가했다. 주요 산업과 기업을 국영으로 한다는 헌법 조항을 개정하지 않고서는 그에 속한 귀속재산의 불하가 어려웠다. 이런 배경에서 1954년 제2차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흔히들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라는 불미의 사건으로만 알지만, 동 개헌은 이 나라의 경제체제를 자유기업주의로 전환시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주요 산업과 기업의 국유·국영 원칙은 폐기되거나 제한됐으며, 사기업을 국·공영으로 이전할 수 있다는 조항도 그것을 금지하는 취지로 바뀌었다. 근로자가 기업 이익의 분배에 참가한다는 조항은 이후 누구도 그 시행을 주장하지 않아서 사문으로 방치됐으며, 이에 개정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것이 폐지되는 것은 1962년의 제5차 헌법 개정에서였다

이후 귀속재산의 불하가 탄력을 받았다. 1963년에 종결된 귀속재산의 매각 실적은 31만여 건에 달했다. 정부 소유의 대기업은 4대 민간은행을 포함해 대부분 민간기업으로 바뀌었다. 1950년대 주요 대기업의 거의 절반이 귀속업체를 전신으로 했다. 귀속재산의 취득은 상당한 특혜였으며, 그 불하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부가 과감하게 자유기업주의로 전환한 위에 후일 고도성장의 주역으로 달리는 자유기업의 군단을 양성한 공적은 부정되지 않는다.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1906~1987).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1906~1987).
민법의 제정

1958년 정부는 새로운 민법을 반포했다. 당시 이항녕 고려대 교수는 우리 민법은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사상에 입각해 있다고 자부했다. 그동안 의용해 온 구(舊)민법은 개인주의 사상에 기초해 소유권절대의 원칙, 계약자유의 원칙, 과실책임의 원칙에 충실했다.

그렇지만 신(新)민법은 자본주의와 대기업이 발달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는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새롭게 대두한 서유럽의, 특히 스위스의 단체주의 사상에 충실했다. 제헌 헌법의 관련 조항과도 보조를 맞췄다. 그에 따라 소유권절대의 원칙을 소유권상대의 원칙으로, 계약자유의 원칙을 계약공정의 원칙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내 나름의 시각에서 본 신민법의 최대 변화는 구민법 제1조에서 선포된 사권(私權), 곧 개인의 천부적 권리라는 개념을 폐기했다는 점이다. 신민법의 철학은 자연법사상과 무관하며 인위의 입법으로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법실정주의(法實定主義)에 매몰됐다. 신민법은 구민법에 없는 총장(總章)을 신설해 “권리는 남용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구민법과 달리 신민법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기보다 그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지향했다. 헌법 개정에 따른 자유기업주의로의 전환은 그리 중요한 변화로 감지되지 않았다.

한국 정치를 소용돌이의 정치로 묘사한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
한국 정치를 소용돌이의 정치로 묘사한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
소용돌이 정치와 사회

1947년부터 장기간 한국에 체류한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 그레고리 헨더슨은 이 나라를 개인의 고독을 특징으로 하는 대중사회로 묘사했다. 친족의 울타리를 나오면 무연(無緣)의 개인이 각축하는 아수라 사회였다. 국가로부터 자립적으로 잘 뭉친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앙권력이 전국을 소용돌이로 휘감아 올리는 단극(單極) 정치의 사회였다.

이 연재에서 강조해 왔듯이 19세기 후반 이래 한국 사회는 홉스적 자연상태로 분해됐다. 일제하에서 잠복한 그 상태는 해방, 건국, 전쟁의 과정에서 더욱 치열하게 재생됐다. 신민법이 의지한 단체주의의 서유럽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다. 신민법이 상정한, 자본주의와 대기업이 발전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는 그런 경제는 더욱 아니었다. 해방의 혼란과 전쟁의 파괴로 모두가 절대 빈곤해져 오히려 평등한 경제였다.

신민법은 해외의 사조에는 민감했지만 자국의 역사와 사회에는 둔감했다. 신민법의 초안을 작성한 법전편찬위원회는 어떤 토론과 조사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특질이다. 신민법이 외래 사조를 빌려 사권을 억압하자 이식된 지 고작 반세기의 근대적 개인은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민법은 거대 국가권력과 취약한 개인이 마주하는 국가주의 경제체제를 구조화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