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주도한 '5대그룹 빅딜'…좌초된 '삼성자동차, LG반도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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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18) 1998년 대기업 사업 구조조정
(18) 1998년 대기업 사업 구조조정
“‘빅딜(big deal·대규모 사업교환)’을 포함한 대기업 구조조정이 조만간 발표될 겁니다.”
외환위기의 원흉으로 대기업그룹의 ‘과잉·중복 투자’ 논란이 도마에 올랐던 1998년 6월 10일.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 조찬강연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굴지의 대기업그룹이 빅딜에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빅딜은 청와대의 극비 프로젝트였다. 물밑 협상의 공개에 당황한 5대 그룹은 즉각 “전혀 논의한 바 없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놀라운 소식은 다른 모든 경제 이슈를 삼키며 일파만파로 퍼졌다.
1997년 말 민간 연구소의 ‘이론적인 구상(構想)’으로 처음 등장한 빅딜. 그 효과를 알 수 없는 실험은 이때부터 국난 극복을 위한 청와대의 과업으로 바뀐다. 훗날 현대·삼성·대우·LG 모두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빅딜의 주사위는 그렇게 던져졌다. 5대 그룹 겨눈 청와대
“이걸 명단이라고 들고 왔어요?”
비서실장의 폭탄발언 1주일 전인 6월 3일. 김대중 대통령은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금감위가 은행을 닦달해 취합해온 ‘퇴출 대상’ 기업 명단을 받아든 뒤였다. 한 쪽짜리 보고서에 적힌 기업은 불과 21곳. 5대 그룹 계열사는 전무했다.
당시 김 대통령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금융·기업부문의 구조조정 노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의 성실한 이행을 내세워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얻고 대북 ‘햇볕정책’ 지지를 받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방미 기간에 나온 비서실장의 깜짝 발언은 이런 효과를 의도한 카드였다. 훗날 김 실장은 “대기업들이 더 이상 구조조정을 미뤄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고 털어놨다.
빅딜의 밑그림은 당선인 시절부터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에는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에게 밀명을 내려 ‘삼각 빅딜’을 짰다. 자동차는 현대, 반도체는 삼성, 석유화학은 LG에 몰아주자는 내용이었다.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회장 출신인 박 총재는 협상이 더디더라도 정부 개입을 극비에 부치려 했다. 자칫 부작용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청와대의 인내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 대통령은 6월 14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빅딜이건 작은 딜이건 간에 5대 그룹이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이어지는 빅딜 정국의 공식 개막 선언이었다.
눈치 빠른 은행들도 서둘러 기업 살생부를 다시 써 올렸다. 당초 예정일보다 열흘 늦은 18일 금감위가 대중에게 공개한 퇴출 대상 기업은 모두 55곳으로 불어나 있었다. 5대 그룹 계열사는 20곳으로 40%에 달했다.
‘슈퍼 빅딜’의 등장
청와대의 과업으로 떠오른 빅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통령 귀국 기자회견 한 달 뒤인 1998년 7월 4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은 청와대에서 회동을 하고 ‘대기업 간 사업교환의 자율적 추진’ 합의를 발표했다. 이후 5대 그룹 회장 비서실(기획조정실)은 구조조정본부로 명함을 다시 파고 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빅딜의 큰 그림은 9월 3일 ‘5대 그룹 7개 업종의 구조조정 계획’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백미는 현대전자(반도체부문)와 LG반도체의 통합 추진이었다. 정유·석유화학·철도차량·항공·발전·선박엔진 부문도 각각의 사업을 떼내고 합쳐 6개 새로운 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슈퍼 빅딜’로 불리는 삼성과 대우의 자동차·전자사업 맞교환 소식은 그해 12월 초 전격적으로 터져나왔다. 삼성이 11월 말 자동차사업을 빅딜로 넘기고 싶다는 의사를 금감위에 전달하면서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당시 삼성은 기아자동차 인수에 최종 실패하면서 ‘자동차사업 포기설’에 휩싸여 있었다. 빚 상환 압박에 시달리던 대우도 마지막 승부수로 삼성의 손을 붙잡았다. 김우중 대우 회장은 “(정부가) 우리 유동성 문제를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 회고했다.
대기업그룹이 환골탈태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란 기대는 12월 7일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열린 대통령 주재 정·재계 간담회에서 5대 그룹은 1999년 말까지 계열사를 절반(264개사→130개사)으로,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맞추겠다고 발표했다. 삼성과 대우의 빅딜 기본합의 사실도 이날 공표했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가져올 진통을 예측하지 못한 금융시장은 환호했다. 코스피지수는 514.52로 23.81포인트(4.85%) 급등해 8개월여 만에 500선을 회복했다.
불가피한 진통
“서로 현금이 오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삼성자동차를 떠안으려면 최소 3조5000억원은 받아야 합니다.”(김태구 대우 구조조정본부장)
1999년 1월 31일 청와대 서별관 회의실. 삼성과 대우 구조조정본부장은 지루한 평행선을 달렸다. 부실 계열사를 경쟁력을 갖춘 상대방에게 넘긴다는 뜻은 좋았지만 실무 협상은 쉽지 않았다. 금감위 중재로 겨우 ’선인수 후정산’ 조건에 합의했더니 이번엔 ‘SM5’ 모델 생산 조건을 놓고 또다시 신경전이 벌어졌다. 초조해진 정부는 이건희·김우중 회장의 만남을 주선해 생산 조건 협상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실무 협상에 들어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협상도 장기간 표류했다. 미래 주력업종을 내건 절박한 싸움이었다. 컨설팅회사 아서D리틀(Arthur D Little)이 ‘현대전자가 통합주체로 적합하다”는 결과를 12월 24일 내놨지만 LG가 반발했다. 참다못한 금감위는 나흘 뒤 금융권에 ‘LG반도체 금융제재를 결의하라’는 팩스를 뿌렸다. 사면초가에 몰린 구본무 회장은 이듬해 1월 6일 청와대를 찾아가 어렵게 입을 뗐다.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포기하겠습니다.”
반도체사업 가격 협상은 이후에도 3개월을 표류했다. 정부 압박에 떠밀린 구 회장과 정몽헌 현대 회장은 4월 19일 만나 각자가 기대했던 평균값에 거래를 합의해야 했다. LG반도체 지분 60% 기준 2조5600억원이었다. 낙담한 구 회장은 이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대부분 불참했다.
승자의 저주
강제로 밀어붙인 빅딜은 시간이 지나면서 ‘승자의 저주’로 발전했다. 새 정부 들어 기아차·LG반도체·한화에너지 등을 싹쓸이하며 시샘을 샀던 현대그룹은 2000년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정몽구·정몽헌 형제간 경영권 다툼인 ‘왕자의 난’에 이어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그룹 전체로 확산했다.
현대전자도 LG반도체와 1999년 10월 합병한 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인수자금 부담과 D램 가격 하락을 버티지 못했다. 1999년 8월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가 인수한 한화에너지(정유 부문)도 2001년 자금 악화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나중에 두 회사는 빅딜을 피해간 SK그룹(각각 SK하이닉스, SK인천석유화학)에 넘어간다.
정부의 특혜 배경으로 의심을 샀던 대북 경제협력 사업도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았다. 정몽헌 회장은 5억달러 규모 ‘대북 비밀송금 의혹 사건’ 관련 특검조사를 받던 2003년 8월 서울 계동 사옥에서 투신했다. 1998년 6월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으로 대북사업에 앞장서기 시작한 지 5년 만이었다.
LG는 반도체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1999년 데이콤 경영권을 확보했지만 속 빈 강정이었다. PC통신 ‘천리안’ 서비스 및 유선전화 사업자였던 데이콤은 1999년 말 한때 시가총액 14조원을 웃돌았으나 이후 빠르게 추락했다. LG는 데이콤의 빚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거금을 집어넣어야 했다. 2010년 LG파워콤·LG텔레콤과의 3자 합병(현 LG유플러스) 소멸 직전 데이콤의 시가총액은 1조5000억원 수준이었다.
빅딜 협상을 주도했던 이 위원장은 자서전 《위기를 쏘다》에서 “정부 주도의 빅딜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반대해왔다”며 “그런데 청와대까지 나서면서 주무 장관인 나도 ‘나 몰라라’ 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실패의 대가
실패한 빅딜의 대가도 컸다. 삼성은 대우와의 협상이 안갯속으로 빠져들자 1999년 6월 11일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첫 합의를 발표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청와대의 사전 동의를 얻기 위해 총수의 사재 출연도 약속했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지분율 17.5%)를 채권단에 손실보전용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주당 70만원으로 계산해 2조4500억원어치였다. 삼성의 ‘자동차·전자 융합의 꿈’도 1995년 닻을 올린 지 4년 만에 물거품으로 변했다.
삼성차의 법정관리는 대우에 내려진 ‘사형선고’였다. 김 회장은 한 달여 뒤인 7월 19일 사재출연을 포함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결국 침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우 주력 계열사들은 이듬해 모조리 채권단 공동관리(워크아웃)에 들어가 공중분해 순서를 밟았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외환위기의 원흉으로 대기업그룹의 ‘과잉·중복 투자’ 논란이 도마에 올랐던 1998년 6월 10일.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 조찬강연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굴지의 대기업그룹이 빅딜에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빅딜은 청와대의 극비 프로젝트였다. 물밑 협상의 공개에 당황한 5대 그룹은 즉각 “전혀 논의한 바 없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놀라운 소식은 다른 모든 경제 이슈를 삼키며 일파만파로 퍼졌다.
1997년 말 민간 연구소의 ‘이론적인 구상(構想)’으로 처음 등장한 빅딜. 그 효과를 알 수 없는 실험은 이때부터 국난 극복을 위한 청와대의 과업으로 바뀐다. 훗날 현대·삼성·대우·LG 모두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빅딜의 주사위는 그렇게 던져졌다. 5대 그룹 겨눈 청와대
“이걸 명단이라고 들고 왔어요?”
비서실장의 폭탄발언 1주일 전인 6월 3일. 김대중 대통령은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금감위가 은행을 닦달해 취합해온 ‘퇴출 대상’ 기업 명단을 받아든 뒤였다. 한 쪽짜리 보고서에 적힌 기업은 불과 21곳. 5대 그룹 계열사는 전무했다.
당시 김 대통령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금융·기업부문의 구조조정 노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의 성실한 이행을 내세워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얻고 대북 ‘햇볕정책’ 지지를 받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방미 기간에 나온 비서실장의 깜짝 발언은 이런 효과를 의도한 카드였다. 훗날 김 실장은 “대기업들이 더 이상 구조조정을 미뤄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고 털어놨다.
빅딜의 밑그림은 당선인 시절부터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에는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에게 밀명을 내려 ‘삼각 빅딜’을 짰다. 자동차는 현대, 반도체는 삼성, 석유화학은 LG에 몰아주자는 내용이었다.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회장 출신인 박 총재는 협상이 더디더라도 정부 개입을 극비에 부치려 했다. 자칫 부작용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청와대의 인내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 대통령은 6월 14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빅딜이건 작은 딜이건 간에 5대 그룹이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이어지는 빅딜 정국의 공식 개막 선언이었다.
눈치 빠른 은행들도 서둘러 기업 살생부를 다시 써 올렸다. 당초 예정일보다 열흘 늦은 18일 금감위가 대중에게 공개한 퇴출 대상 기업은 모두 55곳으로 불어나 있었다. 5대 그룹 계열사는 20곳으로 40%에 달했다.
‘슈퍼 빅딜’의 등장
청와대의 과업으로 떠오른 빅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통령 귀국 기자회견 한 달 뒤인 1998년 7월 4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은 청와대에서 회동을 하고 ‘대기업 간 사업교환의 자율적 추진’ 합의를 발표했다. 이후 5대 그룹 회장 비서실(기획조정실)은 구조조정본부로 명함을 다시 파고 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빅딜의 큰 그림은 9월 3일 ‘5대 그룹 7개 업종의 구조조정 계획’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백미는 현대전자(반도체부문)와 LG반도체의 통합 추진이었다. 정유·석유화학·철도차량·항공·발전·선박엔진 부문도 각각의 사업을 떼내고 합쳐 6개 새로운 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슈퍼 빅딜’로 불리는 삼성과 대우의 자동차·전자사업 맞교환 소식은 그해 12월 초 전격적으로 터져나왔다. 삼성이 11월 말 자동차사업을 빅딜로 넘기고 싶다는 의사를 금감위에 전달하면서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당시 삼성은 기아자동차 인수에 최종 실패하면서 ‘자동차사업 포기설’에 휩싸여 있었다. 빚 상환 압박에 시달리던 대우도 마지막 승부수로 삼성의 손을 붙잡았다. 김우중 대우 회장은 “(정부가) 우리 유동성 문제를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 회고했다.
대기업그룹이 환골탈태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란 기대는 12월 7일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열린 대통령 주재 정·재계 간담회에서 5대 그룹은 1999년 말까지 계열사를 절반(264개사→130개사)으로,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맞추겠다고 발표했다. 삼성과 대우의 빅딜 기본합의 사실도 이날 공표했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가져올 진통을 예측하지 못한 금융시장은 환호했다. 코스피지수는 514.52로 23.81포인트(4.85%) 급등해 8개월여 만에 500선을 회복했다.
불가피한 진통
“서로 현금이 오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삼성자동차를 떠안으려면 최소 3조5000억원은 받아야 합니다.”(김태구 대우 구조조정본부장)
1999년 1월 31일 청와대 서별관 회의실. 삼성과 대우 구조조정본부장은 지루한 평행선을 달렸다. 부실 계열사를 경쟁력을 갖춘 상대방에게 넘긴다는 뜻은 좋았지만 실무 협상은 쉽지 않았다. 금감위 중재로 겨우 ’선인수 후정산’ 조건에 합의했더니 이번엔 ‘SM5’ 모델 생산 조건을 놓고 또다시 신경전이 벌어졌다. 초조해진 정부는 이건희·김우중 회장의 만남을 주선해 생산 조건 협상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실무 협상에 들어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협상도 장기간 표류했다. 미래 주력업종을 내건 절박한 싸움이었다. 컨설팅회사 아서D리틀(Arthur D Little)이 ‘현대전자가 통합주체로 적합하다”는 결과를 12월 24일 내놨지만 LG가 반발했다. 참다못한 금감위는 나흘 뒤 금융권에 ‘LG반도체 금융제재를 결의하라’는 팩스를 뿌렸다. 사면초가에 몰린 구본무 회장은 이듬해 1월 6일 청와대를 찾아가 어렵게 입을 뗐다.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포기하겠습니다.”
반도체사업 가격 협상은 이후에도 3개월을 표류했다. 정부 압박에 떠밀린 구 회장과 정몽헌 현대 회장은 4월 19일 만나 각자가 기대했던 평균값에 거래를 합의해야 했다. LG반도체 지분 60% 기준 2조5600억원이었다. 낙담한 구 회장은 이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대부분 불참했다.
승자의 저주
강제로 밀어붙인 빅딜은 시간이 지나면서 ‘승자의 저주’로 발전했다. 새 정부 들어 기아차·LG반도체·한화에너지 등을 싹쓸이하며 시샘을 샀던 현대그룹은 2000년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정몽구·정몽헌 형제간 경영권 다툼인 ‘왕자의 난’에 이어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그룹 전체로 확산했다.
현대전자도 LG반도체와 1999년 10월 합병한 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인수자금 부담과 D램 가격 하락을 버티지 못했다. 1999년 8월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가 인수한 한화에너지(정유 부문)도 2001년 자금 악화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나중에 두 회사는 빅딜을 피해간 SK그룹(각각 SK하이닉스, SK인천석유화학)에 넘어간다.
정부의 특혜 배경으로 의심을 샀던 대북 경제협력 사업도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았다. 정몽헌 회장은 5억달러 규모 ‘대북 비밀송금 의혹 사건’ 관련 특검조사를 받던 2003년 8월 서울 계동 사옥에서 투신했다. 1998년 6월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으로 대북사업에 앞장서기 시작한 지 5년 만이었다.
LG는 반도체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1999년 데이콤 경영권을 확보했지만 속 빈 강정이었다. PC통신 ‘천리안’ 서비스 및 유선전화 사업자였던 데이콤은 1999년 말 한때 시가총액 14조원을 웃돌았으나 이후 빠르게 추락했다. LG는 데이콤의 빚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거금을 집어넣어야 했다. 2010년 LG파워콤·LG텔레콤과의 3자 합병(현 LG유플러스) 소멸 직전 데이콤의 시가총액은 1조5000억원 수준이었다.
빅딜 협상을 주도했던 이 위원장은 자서전 《위기를 쏘다》에서 “정부 주도의 빅딜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반대해왔다”며 “그런데 청와대까지 나서면서 주무 장관인 나도 ‘나 몰라라’ 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실패의 대가
실패한 빅딜의 대가도 컸다. 삼성은 대우와의 협상이 안갯속으로 빠져들자 1999년 6월 11일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첫 합의를 발표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청와대의 사전 동의를 얻기 위해 총수의 사재 출연도 약속했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지분율 17.5%)를 채권단에 손실보전용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주당 70만원으로 계산해 2조4500억원어치였다. 삼성의 ‘자동차·전자 융합의 꿈’도 1995년 닻을 올린 지 4년 만에 물거품으로 변했다.
삼성차의 법정관리는 대우에 내려진 ‘사형선고’였다. 김 회장은 한 달여 뒤인 7월 19일 사재출연을 포함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결국 침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우 주력 계열사들은 이듬해 모조리 채권단 공동관리(워크아웃)에 들어가 공중분해 순서를 밟았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