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검속 희생 국가 책임, 불법 군사재판 인정 사법적 판단 이끌어
4·3 특별법·희생자 결정 흔드는 각종 보수단체 소송 줄줄이 패소


제71주년 4·3 희생자 추념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념논쟁의 연속 언제까지?…재판으로 본 제주 4·3
해방 직후 이념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짓밟힌 제주 4·3은 71년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향해 힘겨운 걸음을 내딛고 있다.

◇ 불법 군사재판과 끔찍한 예비검속 학살
제주4·3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 좌익 세력의 무장봉기 당시 무장시위대와 군·경찰 및 우익 단체들은 서로를 '통일 반대 세력'이나 '빨갱이'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눴다.

이후 이런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처럼 섬 전체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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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힌 제주에서 이 기간 적게는 1만4천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군경은 한라산으로 올라간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해안가 마을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산간 마을을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을 폈다.

이주 명령(소개령)을 접하지 못한 상당수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에 의해 붙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간 사람들은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 등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불법 군사재판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 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거나 오랜 기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들의 억울한 사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절했다.

1948년 겨울 난리 통에 무조건 아이를 업고 도망치다 붙잡혀 재판을 받고 전주형무소로 보내졌던 오계춘(99) 할머니는 "배에 태워져 가던 중 굶주린 아기가 죽었다.

죽은 아이를 목포 길거리에 두고 온 생각만 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여전히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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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른바 '예비검속'이란 미명아래 무장대와 관련이 있다거나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수백명이 섯알오름에 있는 옛 일본군 탄약고 터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뒤 암매장됐다.

섯알오름 학살 희생자 유족 등 245명은 60년이 지난 2010년 11월 2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까지 이어진 긴 싸움 끝에 2015년 6월 24일 배상 판결을 얻어냈다.

이후 제주 곳곳에서 이뤄진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의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이 이어졌고 대부분 승소했다.

또한 4·3 71주년인 올해 1월에는 4·3 당시 계엄령하에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 나왔다.

부당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생존 수형인 18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지난 1월 17일 불법 군사재판 재심을 통해 공소기각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공소기각이란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경우, 실체적 심리를 하지 않고 소송을 종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번 판결로 재심을 청구한 생존 수형인들이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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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흔들기'의 시작
지난 2000년 1월 많은 논란 끝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4·3 특별법)이 제정된 직후였다.

제주 4·3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폭동으로 보는 견해와 민중항쟁으로 보는 시각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4·3 특별법 제정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일부 보수성향 인사와 예비역 장성출신 모임인 성우회는 같은 해 4월과 5월 연이어 국회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4·3 특별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이들은 "제주 4·3을 1948년 북한 공산당과 남로당이 한반도를 적화(赤化·공산주의에 물들게 함)하기 위해 일으킨 '공산무장반란'"이라고 규정하고, "4·3 특별법이 이를 합법화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공산반란군에 의해 경찰·군인·양민들이 피살되는 등 큰 피해를 봤음에도 (4·3 특별법이) 공산무장반란군을 경찰·군인·양민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위령토록 규정, 헌법에 규정된 자유주의적 기본질서를 위반하고 기본권인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헌법소원을 청구한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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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헌재 전원재판부는 2001년 9월 27일 재판관 9명 중 7명의 다수의견으로 각하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4·3 특별법이 희생자의 범위를 확정하지 않고, 희생자 결정을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에 위임하는 만큼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제주 4ㆍ3에 대한 공격은 계속됐다.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정부의 공식 보고서로 확정되고, 이를 토대로 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며 공식으로 사과한 것이 발단이 됐다.

2004년 7월 20일 보수단체인 자유시민연대는 18만 5천여명의 서명을 받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와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 행위 취소를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냈다.

청구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의 무장반란인 제주 4·3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으로, 2000년 4·3 특별법을 위헌이라고 주장했던 당시 주장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헌재는 이번에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대통령의 성명은 대통령이 국가 내지 정부를 대표해 유족 등에게 제주4·3사건 희생에 관한 의견과 감상을 표명한 것"이라고 전제, "이를 헌법소원 대상이 되는 공권력의 행사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없고, 진상조사보고서 역시 청구인들의 법적 지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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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필요한 이념 논쟁 끝내야 할 때
제주 4·3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과정을 흔드는 각종 시도는 재판 과정에서 다양하게 전개됐다.

우선 4·3 희생자 선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헌재는 지난 2001년 보수단체가 제기한 4·3 특별법 위헌심판 청구를 기각하면서 "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적극적으로 살인·방화 등에 가담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본질을 훼손한 자들은 희생자로 결정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상 희생자 선정 제외기준을 명시한 셈인데 일부 보수 인사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소송을 제기했다.

4·3 특별법 제정 이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명예회복위원회는 2009년 4월까지 모두 1만3천500여명을 희생자, 2만9천239명을 유족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4·3 특별법 개정을 통해 군사재판과 일반재판을 받아 형무소에 갇혔던 수형인과 무기수, 사형수까지 희생자 범위에 추가됐다.

보수단체는 2009년 한 해 동안 4·3 희생자 결정에 대해 문제 삼는 2건의 헌법소원과 2건의 행정소송, 2건의 민사소송 등 6건의 소송을 한꺼번에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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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등은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 중 상당수가 남로당 간부이거나 폭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이라며 4·3 희생자 결정이 위헌이자 이로인해 자신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고 주장했다.

이 6건의 소송 외에도 희생자 결정 무효 확인 청구 소송은 계속됐으나 2016년까지 이어진 항소와 상고를 거쳐 모두 줄줄이 패소했다.

이후에는 심지어 제주 4·3 희생자의 영령을 추념하는 공간인 제주4·3평화공원 내 4·3기념관의 전시를 금지해달라는 취지의 소송까지 나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 등 6명은 지난 2015년 3월 20일 "4·3기념관의 전시 내용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왜곡하고 이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억4천만원 상당의 위자료 지급을 요구했다.

이 역시 2017년 4월 대법원까지 이어진 지루한 소송전 끝에 원고 패소했다.

이외에도 제주 4·3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많은 소송이 이어졌다.

시민단체와 학자, 법조계 인사 등은 한결같이 "더 이상의 불필요한 이념 논쟁을 끝내고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바탕으로 4·3의 완전해결을 위해 모두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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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