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 기막힌 상상력…사진·영상으로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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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
'더 리빌링 이미지'展
용인 뮤지엄그라운드서 개막
'더 리빌링 이미지'展
용인 뮤지엄그라운드서 개막
지난달 29일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의 홍콩경매에서 벨기에 초현실주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세이렌의 노래’가 응찰자들의 치열한 경합 끝에 추정가 4000만~4800만홍콩달러를 훌쩍 넘긴 약 72억원(5000만홍콩달러)에 팔렸다. 낙찰가의 18%인 구매 수수료까지 더하면 85억5200만원이다. 마그리트 작품이 아시아 경매시장에 처음 나온 것은 물론, 초고가에 팔려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현대미술 거장 마그리트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발아’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경기 용인 뮤지엄그라운드에서 1일 개막한 ‘르네 마그리트, 더 리빌링 이미지(The Revealing Image)-사진과 영상’전을 통해서다. 전시장에는 벨기에 자비에 카노네미술관과 개인 소장가 5명에게 빌려온 사진과 영상, 판화 등 총 150여 점이 걸렸다. 상식의 세계를 뒤집은 마그리트의 유년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삶의 여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엿볼 수 있다. 사진 영상 등 130점 출품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그리트는 20대 초반 벨기에 왕립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초기에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26년부터 5년간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살바도르 달리와 호안 미로, 시인 폴 엘뤼아르 등과 교류하며 상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사고를 시각예술로 승화시켰다. 당시 파리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무의식적 자동기술법인 ‘오토마티즘(Automatisme)’에 심취한 것과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사과, 돌, 새, 담배 파이프 등 친숙한 대상을 엉뚱하게 결합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즐겨 썼다. 그림으로 관계와 실존의 미학을 시도한 그의 데페이즈망 기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팝아트를 비롯해 영화·건축·광고 등 문화산업 전반에 많은 영향을 줬다.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던 마그리트는 말년에 회화 속 이미지를 조각으로 제작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한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그는 이런 다채로운 예술 여정 때문에 ‘미술 혁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마그리트 미학의 자양분
마그리트의 혁신적인 미학은 사진, 영상예술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56년 10월 카메라를 구입한 마그리트는 평소 아내와 친구, 반려견 등 소소한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거나 단편 영화로 찍기를 즐겼다. 사진을 기억의 기록물이 아니라 창의적인 수단으로 간주한 그였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반복적으로 재현한 그림들을 합성하듯 즉흥적인 형식으로 사진을 쏟아냈다. 카메라 렌즈로 포착해 작품을 보는 방식에 의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 새로운 해석도 제시했다. 카메라를 이젤과 같이 중립적 도구로 여겼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28년 찍은 ‘사랑’을 비롯해 ‘통찰력’ ‘거인’ 등은 그림이 완성되기 전 작업 풍경을 사진으로 남긴 대표작들이다. ‘그림자와 그 그림자’, 부인 조제트의 초상화 ‘망각 판매자’ 등 사진도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 거장’이란 수식어에 가둘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식이 없어 평소 사랑을 듬뿍 준 반려견을 포착한 ‘마그리트와 강아지’, 배우 존 웨인의 모습을 흉내 낸 ‘말을 탄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와 야만인’ 등 사진들은 전시장에 청량감을 안겨준다. 동물 캐릭터까지 생생하게 드러낸 사진은 화면 밖 관람객을 대담하게 응시하며 초현실주의 미학을 탁월하게 다룬 마그리트 작업이 수많은 노력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일러준다.
영상작업도 관람객을 압도한다. 어린 시절 영화에 빠졌던 그는 1950년대 직접 대본을 쓰고 오랜 친구들과 함께 짧은 홈 비디오를 만들기도 했다. 8㎜ 카메라로 촬영한 비디오 7편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푀이야드의 ‘판토마’에서 영감을 받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물들이다. 마그리트 스스로 “나는 영화가 아니라 홈 비디오를 만든다”고 말할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풀어낸 솜씨가 인상적이다. 전시는 오는 7월 10일까지 이어진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현대미술 거장 마그리트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발아’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경기 용인 뮤지엄그라운드에서 1일 개막한 ‘르네 마그리트, 더 리빌링 이미지(The Revealing Image)-사진과 영상’전을 통해서다. 전시장에는 벨기에 자비에 카노네미술관과 개인 소장가 5명에게 빌려온 사진과 영상, 판화 등 총 150여 점이 걸렸다. 상식의 세계를 뒤집은 마그리트의 유년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삶의 여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엿볼 수 있다. 사진 영상 등 130점 출품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그리트는 20대 초반 벨기에 왕립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초기에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26년부터 5년간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살바도르 달리와 호안 미로, 시인 폴 엘뤼아르 등과 교류하며 상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사고를 시각예술로 승화시켰다. 당시 파리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무의식적 자동기술법인 ‘오토마티즘(Automatisme)’에 심취한 것과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사과, 돌, 새, 담배 파이프 등 친숙한 대상을 엉뚱하게 결합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즐겨 썼다. 그림으로 관계와 실존의 미학을 시도한 그의 데페이즈망 기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팝아트를 비롯해 영화·건축·광고 등 문화산업 전반에 많은 영향을 줬다.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던 마그리트는 말년에 회화 속 이미지를 조각으로 제작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한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그는 이런 다채로운 예술 여정 때문에 ‘미술 혁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마그리트 미학의 자양분
마그리트의 혁신적인 미학은 사진, 영상예술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56년 10월 카메라를 구입한 마그리트는 평소 아내와 친구, 반려견 등 소소한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거나 단편 영화로 찍기를 즐겼다. 사진을 기억의 기록물이 아니라 창의적인 수단으로 간주한 그였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반복적으로 재현한 그림들을 합성하듯 즉흥적인 형식으로 사진을 쏟아냈다. 카메라 렌즈로 포착해 작품을 보는 방식에 의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 새로운 해석도 제시했다. 카메라를 이젤과 같이 중립적 도구로 여겼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28년 찍은 ‘사랑’을 비롯해 ‘통찰력’ ‘거인’ 등은 그림이 완성되기 전 작업 풍경을 사진으로 남긴 대표작들이다. ‘그림자와 그 그림자’, 부인 조제트의 초상화 ‘망각 판매자’ 등 사진도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 거장’이란 수식어에 가둘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식이 없어 평소 사랑을 듬뿍 준 반려견을 포착한 ‘마그리트와 강아지’, 배우 존 웨인의 모습을 흉내 낸 ‘말을 탄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와 야만인’ 등 사진들은 전시장에 청량감을 안겨준다. 동물 캐릭터까지 생생하게 드러낸 사진은 화면 밖 관람객을 대담하게 응시하며 초현실주의 미학을 탁월하게 다룬 마그리트 작업이 수많은 노력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일러준다.
영상작업도 관람객을 압도한다. 어린 시절 영화에 빠졌던 그는 1950년대 직접 대본을 쓰고 오랜 친구들과 함께 짧은 홈 비디오를 만들기도 했다. 8㎜ 카메라로 촬영한 비디오 7편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푀이야드의 ‘판토마’에서 영감을 받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물들이다. 마그리트 스스로 “나는 영화가 아니라 홈 비디오를 만든다”고 말할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풀어낸 솜씨가 인상적이다. 전시는 오는 7월 10일까지 이어진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