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산불 대피소인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동광중학교 체육관에서 마음을 추스르던 한모(81) 할머니는 전날 저녁 붉은 화마가 인흥2리 마을 바로 앞산에 번지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들 부부, 4살배기 손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 막 이른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그때였다.
창문 틈새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오더니 마을 바로 앞 야트막한 산으로 빨간 불길이 치솟는 광경이 보였다.
한 할머니는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며 "옷도 못 입고 양말도 못 신고 그렇게 뛰쳐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바로 옆집 차를 얻어 타고 부랴부랴 차로 15분 거리인 동광중으로 향했다.
그의 발은 전날 저녁 대피소에 온 뒤로 계속 씻지 못해 까만 그을음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이날 해가 밝자마자 아침 일찍 화재 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마을로 향했지만 집은 이미 불에 절반 넘게 탄 상태였다고 한다. 한 할머니는 "물도 불도 안 나오고 그냥 다 타 버렸다"며 "마을에 갔는데 목이 아프고 매캐해 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다른 주민들은 대피 인원이 많았던 전날 저녁에 비해 훨씬 한산해진 체육관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초록색 매트 위에 누워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하거나 가족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역시 인흥2리 주민이라는 한 주부는 연신 "다 타 버렸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인근 인흥3리 역시 18가구 중 13가구가 모두 불에 탄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도 피해 복구 때문에 주민회관 앞에 몰려든 소방차와 군청 관계자들의 차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이제은(72) 용촌2리 이장은 "어제 저녁에 갑자기 뒷산까지 불이 삽시간에 번지는 바람에 황급히 대피하라고 방송을 했다"며 "그래서 짐도 하나 못 챙긴 채 몸만 대피한 주민이 많다"고 말했다.
분주하게 현장을 돌아다니며 피해상황을 살핀 이씨는 "몇 집이나 탔느냐"는 질문에 빼곡히 적힌 주민 이름을 세더니 "용촌2리 1반에서만 21가구 집이 모두 탔고 2반도 만만찮은데 아직 집계가 안 됐다"고 말했다.
앞서 전날 오후 7시 17분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한 주유소 개폐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 산으로 옮겨붙었다.
이 불로 1명이 숨지고 축구장 350개 크기의 산림(250㏊)이 잿더미로 변했다.
초속 20∼30m의 강한 바람을 타고 밤사이 산불이 확산하면서 인근 주민 3천620명이 대피하기도 했다.
산림청은 이날 오전 8시 15분을 기해 고성 산불의 주불 진화를 마무리하고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