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의 디자인 교체가 예정된 일본 지폐. 2024년부터 새로운 인물들이 도안된 지폐가 사용될 예정이다.
20년만의 디자인 교체가 예정된 일본 지폐. 2024년부터 새로운 인물들이 도안된 지폐가 사용될 예정이다.
일본이 1000엔권, 5000엔권, 1만엔권의 3종류 지폐 도안을 모두 바꾸기로 했습니다. 내달 새 일왕 즉위와 함께 새 연호(레이와(令和))가 사용되는 것에 맞춰 지폐 디자인을 바꿔 사회 분위기를 일신키로 한 것입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운 지폐 도안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지폐에 등장했던 대표 인물들이 모두 교체될 예정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84년부터 최고액권인 1만엔(약 10만원)권에 그려진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초상이 35년 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1984년 쇼토쿠 태자 대신 일본 지폐의 대표 격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대신 등장하는 인물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입니다. 시부사와는 다이이치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과 도쿄증권거래소 등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5000엔권(약 5만원)은 현행 지폐도안 처럼 여성인물이 모델입니다. 기존 5000엔권 모델이었던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우(樋口一葉) 대신 일본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자 여성교육의 선구자인 쓰다 우메코(津田梅子)가 자리 잡게 됐습니다. 쓰다는 6세 때인 1871년 메이지 정부의 구미시찰단인 이와쿠라(岩倉)사절단에 여성 유학생으로 선발돼 미국에 건너가 공부한 인물입니다. 일본에 귀국한 뒤 쓰다주쿠대학(津田塾大学)이라는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했습니다.

가장 자주 쓰이는 1000엔권(약 1만원)의 경우엔 유명 세균학자가 바통을 터치하게 됐습니다. 현재는 매독균과 황열병 연구로 유명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가 1000엔권의 모델입니다. 한국에선 ‘닥터 노구치’라는 만화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노구치 대신 1000엔권의 모델이 되는 인물은 페스트균 연구자이자 파상풍 치료법 개발자인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입니다. 기타사토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 유학해 저명한 세균학자 코흐에게 사사한 내과의사입니다. 1894년 홍콩에서 유행한 페스트의 원인균을 찾아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 15인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날 공개된 새 지폐는 당장 발행과 유통은 되지 않고 2024년 상반기에 전면 선을 보일 계획입니다. 일본에서 지폐 도안이 변경되는 것은 2004년 이후 20년만이 됩니다. 마이니치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이처럼 지폐 도안을 바꾸기로 한 것은 새 일왕 즉위와 신연호 사용에 맞춰 사회 분위를 새로 바꾸려는 의도가 강하다고 합니다. 여기에 소비 진작과 경기 활성화 소망도 담겨 있습니다. 각종 자판기 등의 신규 교체수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 지폐가 도입되면 소비 진작 효과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금융권 등에서는 ATM, 자판기 교체 등이 비용 증가요인이 되는 만큼 부담도 적지 않을 전망입니다. 대신 여전히 현금결제 비중 높은 일본에서 이번 조치가 캐시리스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기대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1946년, 1963년, 1984년, 2004년에 이어 2024년 등 대략 20년 주기로 화폐 디자인을 바꿔왔습니다. 쇼토쿠 태자, 이토 히로부미, 나쓰메 소세키 등이 일본 지폐 모델로 등장했다가 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위조방지가 화폐 디자인 개편의 주요 목적이었지만 최근 들어선 사회 분위기 일신, 소비 진작 등 다른 요소가 더 주목받는 모습입니다.

한국에서도 지폐 모델이 조선시대 인물로만 구성돼 있고, 유학자와 현모양처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논란이 이어져 왔습니다. 10만원권 고액권을 만들 경우, 모델로 누구를 선정할 것이냐를 두고도 이견이 적지 않은 상황입니다.

반면 일본의 지폐 디자인 변경은 정부 주도로 전격적으로 이뤄지는 듯한 인상이 강합니다. 지폐의 모델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인물들로만 구성된 점도 눈에 띕니다.

20년만의 일본 지폐 디자인 변경이 일본 정부가 구상한대로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 경기 부양 효과를 볼 수 있을지 결과가 주목됩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