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노 대통령 "인내심 한계 도달"…대통령 개인정보 유출이 '결정타'
코레아 前대통령은 에콰도르 비난…"모레노는 부패한 사람"
어산지 체포 부른 에콰도르와의 갈등…"망명 조건 수차례 어겨"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47)가 11일(현지시간) 7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영국 경찰에 전격 체포된 것은 에콰도르 정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런던에 있는 에콰도르대사관은 어산지와 크고 작은 갈등 끝에 이날 대사관 안으로 영국 경찰관들의 진입을 허용했다.

호주 출신인 어산지는 2010년 위키리크스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미국 기밀문서 수십만 건을 올려 1급 수배 대상이 됐다.

어산지는 2011년 영국에 체류하던 중 과거 스웨덴에서 성범죄 2건을 저지른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돼 영국 경찰에 붙잡혔다.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던 그는 영국 대법원에서 스웨덴 송환 결정이 나자 자신을 결국 미국으로 송환해 처벌하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하고 2012년 6월 런던 주재 에콰도르대사관으로 피신한 뒤 7년간 망명자 신분으로 생활하며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산지가 런던 주재 에콰도르대사관으로 피신했던 당시는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좌파 성향의 코레아 전 대통령은 남미의 대표적인 반미주의자로 어산지를 기꺼이 수용했으며 그의 초기 피신 생활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어산지는 코레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지는 중도좌파 성향의 레닌 모레노 대통령이 2017년 취임한 뒤 에콰도르 정부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모레노 대통령은 코레아 전 대통령 집권 시절 부통령을 지내는 등 코레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였다.

코레아 전 대통령은 그러나 모레노 대통령이 집권 후 시장 친화적으로 바뀌며 이전 정권과 다른 우파 노선을 추구하자 21세기 사회주의 이상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모레노 대통령은 코레아 전 대통령 측이 자신을 원격으로 감시하기 위해 집무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고 비난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틀어졌다.

모레노 대통령은 특히 침체한 경제를 살리고 외채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난 2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시장 친화적이며 미국에 협조적인 움직임을 보여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레노 대통령은 지난달에는 남미국가연합(UNASUR)을 대체하기 위해 남미 우파 국가들이 중심이 된 프로수르(PROSUR) 창설 정상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어산지와 에콰도르 정부와의 갈등은 지난해부터 수면 위로 본격적으로 떠 올랐다.

에콰도르는 지난해 3월 어산지가 러시아 이중스파이 암살시도 사건, 카탈루냐 분리독립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의견을 올리며 논란을 일으키자 외부통신을 차단했다가 일부 풀어준 뒤 내정간섭 금지 등 망명 의무사항을 추가했다.

에콰도르 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국가의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 망명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발한 어산지는 지난해 10월 에콰도르 정부를 상대로 기본권 침해 등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어산지에 대한 에콰도르 정부의 '인내심'은 최근 들어 한계점에 도달했다.

무엇보다 모레노 대통령을 겨냥한 개인정보 유출이 결정타였다.

모레노 대통령은 지난 2일 에콰도르 라디오 방송협회와 한 인터뷰에서 어산지가 "반복적으로 망명 조건을 위반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모레노 대통령은 특히 위키리크스가 자신의 전화 통화와 사적인 대화, 침실 사진, 아내와 딸이 춤을 추는 모습 등을 가로채 공개했다고 비난했다.

위키리크스가 모레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가족과 유럽에서 거주하던 당시 입수한 개인정보를 소셜미디어에 유포했다는 것이다.

이후 영국 경찰은 어산지가 2012년부터 머물러온 건물에서 '수 시간 내지는 수일 내에 쫓겨날 수 있다'는 위키리크스의 트윗이 지난주에 게시되자 런던 주재 에콰도르대사관 밖에 경찰들을 배치하면서 체포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에콰도르는 어산지가 영국 경찰에 체포되기 하루 전인 10일 어산지와 위키리크스가 자국 정부의 불안정을 위해 협력했다고 비난하며 어산지의 시민권을 정지했다.

에콰도르 정부는 2017년 12월 어산지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모레노 대통령은 이날 "어산지가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개입한 후 우리 정부의 행동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면서 그가 망명과 관련한 국제규정을 반복적으로 위반함에 따라 외교적 보호조치를 철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가장 최근에 발생한 사건은 올해 1월 위키리크스가 바티칸의 문서를 유출한 일"이라며 "이는 어산지가 여전히 위키리크스와 연결돼 다른 국가의 내정간섭에 관여한다는 세간의 의혹을 확인시켜줬다"고 부연했다.

이외에도 어산지는 런던 주재 에콰도르대사관의 보안 카메라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보안 파일에 접근하고 경비원들과 충돌하기도 했다는 게 모레노 대통령의 주장이다.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있는 어산지의 변호사 카를로스 포베다는 어산지가 모레노 대통령의 부패혐의를 제기한 데 대한 보복으로 망명이 종결됐으며 어산지가 미국으로 추방될 경우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모레노 대통령은 영국 정부가 서면으로 고문을 받거나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나라로 어산지를 인도하지 않겠다는 점을 확인했다며 영국 정부가 이런 조건을 충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에콰도르 정부의 입장 선회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코레아 전 대통령은 어산지에 대한 에콰도르 정부의 정책 철회를 '범죄'라고 비난했다.

현재 벨기에서 체류 중인 그는 트위터를 통해 "모레노 대통령은 부패한 사람"이라면서 "그가 저지른 일은 인류가 결코 잊지 못할 범죄"라고 비난했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도 트위터에 "우리는 어산지의 구금과 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인권침해, 민간인 암살, 외교 사찰 등을 폭로해 미국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형제와의 연대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어산지의 다른 변호인인 제니퍼 로빈슨은 어산지가 미국으로의 신병 인도에 맞서 싸울 것이라며 이번 체포는 언론인들의 권리에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고 말했다.

/연합뉴스